※이슈는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습니다. 넓고 깊게 살펴야 이슈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열쇳말로 이슈를 분석하는 <이슈 후벼파기>입니다.
주인공: 기본소득
주제: 기본소득은 행복한 은퇴의 마중물이 될 수 있을까
엿쇠말: 뿌리, 백가쟁명, 핀란드 실험, 재원 마련
개요: 정부가 전 국민에게 최대 100만원(4인가구 기준) 규모의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한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지급 전까지 많은 말들이 오갔지만 지난 한 달을 돌이켜보면 국민들의 가처분소득을 늘려 소비를 진작시킨 효과는 분명 있었던 것 같습니다. 건국 이래 중산층이 아무런 조건 없이 정부로부터 돈을 받아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죠. 각 가정마다 적극적인 소비로 긴급재난지원금 잔고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을 요즘 정치권에 새로운 화두가 떠올랐습니다. 바로 기본소득이죠. 코로나19 확산을 계기로 긴급재난지원금 같은 일회성 지급에 그칠 것이 아니라 매월 일정액을 모든 국민에게 지급해서 소비를 촉진하고, 경제를 활성화하자는 것입니다.
예전 같으면 '포퓰리즘'으로 치부했을 법한 주장인데 이번엔 좀 다릅니다. 여론조사업체가 최근 실시한 조사를 보면 찬성이 48.6%, 반대가 42.8%로 팽팽합니다. 기본소득의 '맛보기' 격인 긴급재난지원금이 어느정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됩니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여·야를 막론하고 기본소득 도입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이 늘고 있죠. 아직은 시기 상조라며 반대 의견을 피력하는 정치인들도 있습니다만 분명한 건 기본소득이 정치권의 중요 화제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특히 기본소득은 은퇴를 준비하는 4050세대의 삶과도 관련이 깊습니다. 최소 생활비 명목으로 일정 금액을 받을 수 있다면 은퇴 이후 재취업·창업 등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데 좀 더 여유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본소득은 행복한 은퇴의 마중물이 될 수 있을까요. 이슈후벼파기에서 기본소득 논란을 정리해봤습니다.
기본소득(基本所得)의 정확한 개념은 뭘까요. 국어사전을 찾아봤습니다. "경제 재산의 많고 적음이나 근로 여부에 상관없이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무조건적으로 지급하는 소득이다. 기본 생활을 보장하는 수준으로 개별적이고 균등하게 지급한다." 쉽게 얘기하면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해 한시적으로 지급된 긴급재난지원금을 평시에도 매월 주는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기본소득'이란 개념의 뿌리는 매우 깊고 오래됐습니다. 16세기 초 영국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토머스 모어는 저서 '유토피아'에서 기본개소득 개념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생계형 절도범들에게 끔찍한 처벌을 가하는 대신, 모든 사람에게 약간의 생계수단을 제공하는 것이 훨씬 더 적절하다”고 설파했죠. 18세기엔 미국 독립 전쟁과 프랑스혁명에 참여한 미국 정치인 토머스 페인이, 19세기에는 프랑스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와 영국 공리주의자 존 스튜어트 밀 등이 기본소득을 주창했습니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기본소득의 개념은 프랑스 경제철학자 앙드로 고르로(Andre Gorz·1923~2007)을 통해 좀 더 다듬어 졌습니다. 그는 저서 '경제이성비판'에서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생산 과정에서 노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감소하기 때문에 앞으로 노동 소득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가 점점 어려워질 것"이라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본소득을 대안으로 제시했죠.
기본소득에 대한 논란은 다양합니다. 보수와 진보 진영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리죠. 요즘 정치권의 논의를 보면 백가쟁명(百家爭鳴)이 따로 없습니다. 국내에서 기본소득 논의에 처음 불을 당긴건 이재명 경기도 지사입니다. 이 지사는 2017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모든 국민에게 연간 최대 130만원을 기본소득으로 지급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죠. 당시만 해도 이 같은 주장이 정치권에서 본격적인 논의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수면 아래로 가라 앉았던 기본소득 논의를 뭍으로 끌어 올렸습니다. 지난달 초 정부가 4인 가구 기준 100만원의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하면서 소상공인 매출이 지난해 수준을 회복하는 등 소비 진작 효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경기연구원이 BC카드 매출 자료를 토대로 경기도 재난기본소득 및 정부 긴급재난지원금 지원효과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전년 동기 매출을 100%로 가정했을 때 도내 지역 화폐 가맹점의 매출은 재난기본소득 지급이 시작된 15주 차(4월 6∼12일) 118%로 출발해 17주 차(4월 20∼26일) 140%, 20주 차(5월 11∼17일) 149%를 기록했습니다. 21주 차(5월 18∼24일) 는 159%, 22주 차(5월 25∼31일)는 159%로 8주 평균 44%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이 지사는 “기본소득은 기존의 복지정책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수요와 공급의 선순환을 만들어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근본적인 경제 대책”이라고 주장합니다. 장기적으로 양극화가 심해지고 좋은 일자리가 갈수록 줄어드는 상황을 타개하려면 기본소득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죠.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 3일 “이제는 기본소득 문제를 근본적으로 고민해야 할 시기”라며 불씨를 키웠습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도 김 위원장이 기본소득 이슈를 제기한 이튿날인 지난 4일 “어려운 계층에 우선 배분돼야 한다는 개념에 따라 한국형 기본소득 도입 방안을 집중 검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물론 신중론도 있습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 지사의 기본 소득도입 주장에 대해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그 돈이 어디서 나오느냐”며 “전국민 고용보험을 우선 도입해야 한다”고 반박했죠. 그는 “24조원의 예산이 있다면 성인 인구 4,000만명에게 월 5만원씩 나눠주는 것보다 실직자 200만명에게 100만원씩 나눠주는 것이 낫다”며 구체적인 통계를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유력 대권 주자인 이낙연 민주당 의원도 지난 8일 “기본소득제의 취지를 이해한다”며 “재원 확보 방안과 지속 가능한 실천 방안 등의 논의가 이뤄지길 바란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였습니다.
기본소득 도입 자체를 반대하는 정치인도 있습니다. 홍준표 무소속 의원은 “기본소득제의 본질은 사회주의 배급제도를 실시하자는 것과 다름이 없다”며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죠. 노동 여부와 관계 없이 기본소득을 지급할 경우 노동의 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의외로 진보 진영에서도 이런 이유로 기본 소득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해외로 눈을 돌려봐도 기본소득을 국가 차원에서 도입한 곳은 아직 없습니다.
다만 전 국가적으로 도입 실험을 한 유일한 사례가 있는데, 바로 핀란드입니다. 핀란드는 지난 2017년 25~58세 실업자 2,000명을 무작위로 골라 2년간 매달 560유로(약 73만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실업률 감소와 일자리 창출이 목표였죠. 핀란드는 실업급여를 장기간 주는데 취업하면 끊깁니다. 그러다 보니 실업자들이 일자리를 구하려 하지 않았고, 실업률은 치솟았죠. 기본소득은 취업을 하더라도 계속 주기 때문에 근로의욕을 높일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핀란드 정부의 최종 보고서에 따르면 기본 소득이 행복감 상승 등 복지에 미치는 영향은 있었지만 당초 목표한 고용 촉진 효과는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스위스도 기본소득 도입을 추진했던 적이 있습니다. 스위스 정부는 지난 2016년 전 국민에게 기본소득 보장액으로 매달 2,500스위스프랑(약300만원)을 지급하는 방안을 국민투표에 부쳤죠. 하지만 불확실한 재원 마련 방안 탓에 반대 77%로 부결됐습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도 2017년부터 3년간 저소득층 4,000명에게 매달 1,320캐나다달러(약 115만원)을 주는 실험을 실시했습니다. 일자리를 얻으면 지원 대상에서 제외하는 형식이었지만 재원 고갈로 실험은 1년만에 중단됐습니다.
기본소득은 겉만 봤을 땐 좋은 제도입니다. 모든 국민에게 매월 생계비 명목으로 돈을 뿌려주는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기본 소득을 지급하기 위한 재원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논의는 무의미해집니다. 기존에 받았던 혜택을 줄이거나, 세금을 더 내는 방식을 통해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거부감이 커질 수 밖에 없죠.
더미래연구소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민에게 월 30만원을 기본소득으로 주려면 매년 186조원이 필요하고, 50만원을 주려면 309조원이 필요합니다. 지난해 정부의 총지출 예산이 460조원입니다. 한 해 예산의 60% 이상을 더 확보해야 월 50만원의 기본소득 지급이 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월 10만원씩 줘도 62조. 정부의 올해 현금성 복지예산 54조 원보다도 큰 규모입니다. 기존 복지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기본소득을 도입하려면 그만큼 세금을 더 걷거나 국채를 발행해 메워야 합니다. 그런데 국채발행은 쉽지 않습니다. 기획재정부는 오는 2022년 국가부채가 1,00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의 50% 수준입니다.
결론은 증세인데, 앞서 말했듯이 이를 반길 국민은 많지 않죠. 여야가 최근 경쟁하듯 ‘묻고 더블로 가’ 식으로 기본 소득제를 논의해선 안되는 이유입니다. 치열한 토론은 좋습니다. 하지만 ‘재원 마련 계획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기본 소득을 둘러싼 논의가 산으로 갈 수 있습니다. 정치권에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 만큼 기본소득이 표를 얻기 위한 정치적 구호에 끝나지 않기를 기대해봅니다.
/서민우기자 ingaghi@lifejump.co.kr
- 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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