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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형색색 물든 실, 전통에 시대를 수놓다

[대한민국명장을 찾아서] 이승희 전통자수연구소 대표

15살 때 바늘 잡은후 50년 외길

민화 벗어나 '추상적 작품' 시도

철학·스토리 담아 현대적 재해석

제작기간 수개월…불만족땐 해체

"작품 아닌 잡품 팔면 구걸이죠"

이승희 명장이 지난 1995년 선보인 자수 작품 ‘기억’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작품 속 연잎을 든 여인이 바로 이 명장이다.

이승희 명장이 자신의 모습을 작품 속에 투영한 자수 ‘기억’.


황룡이 구름 속을 지나 폭포수를 맞는다. 하늘은 온통 보라색이고, 땅에는 오리들이 평화롭게 놀고 있다. 도원경이 이런 모습일까. 그림 속 풍경이 아니다. 형형색색의 실로 그려진 자수 작품 ‘기억’이 만든 세상이다. 한 손에 연잎을 들고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작품 속 여인. 바로 대한민국 자수 명장 이승희(65·사진) 전통자수연구소 대표다.

이 명장은 38세에 고(故) 진의종 전 국무총리의 부인 이학 여사가 설립한 이학예술문화진흥원에서 문화예술상을 받으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미국·독일·일본 등에서 전시회를 여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고 지난 2007년 자수 공예 분야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되며 대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2016년에는 노동부 장관상 표창장도 받았다.

이 명장이 처음 손에 실과 바늘을 잡은 때는 15세. 동네 남자애들과 야구나 탁구, 자전거를 타며 시간을 보낸 말괄량이는 원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자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그런 그를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본 모양이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자수를 해보는 게 어떠냐고 말씀하셨어요. 마침 옆집에 자수를 하는 언니도 있었고요. 그게 자수의 길로 들어선 첫걸음이었습니다.”

이승희 명장이 서울 낙원동 전통자수연구소에서 새로 준비 중인 작품에 들어갈 꽃잎을 완성하기 위해 확대경을 보며 자수를 놓고 있다.


자수는 보통 민화를 바탕으로 한다. ‘전통적’으로 그랬다. 이 명장은 다르다. 그의 작품에는 민화를 그대로 옮긴 것도 있지만 ‘추상’으로 표현한 것들도 상당수다. 8일 서울 낙원동 종로오피스텔 내 전통자수연구소에서 만난 이 명장은 그 이유를 “‘자수는 옛날 것’이라는 틀을 깨고 싶어서”라고 설명한다.

그는 “예술은 시대성을 담고 있어야 한다. 똑같은 것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재해석하고 내 색깔을 녹여 넣어 개별성을 부여해야 다양해질 수 있다”며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베끼기만 하면 단순노동과 무엇이 다른가. 어떤 철학을 담을 것인지 무슨 스토리를 넣는지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물론 주위에서는 말이 많았다.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는 비난도 많이 들었다. 그래도 이 명장은 현대미술 전시회를 찾고 관련 책을 본다. “우물을 파고 그 속에서 내 메아리만 들어서는 안 된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철칙이다.

민화를 자수로 그대로 옮겨 담은 작품


사고의 전환은 서양화와의 만남에서 비롯됐다. 이 명장은 늦깎이 대학생이다. 32세에 부산여대(현재의 신라대) 미술학과에 입학했다. 전공은 동양화가 아닌 서양화. “어려서부터 소재를 다루다 보니 동양화에서는 볼 수 없는 현대적인 색감과 선을 서양화에서 보게 됐고 그 뒤로 어떻게 그것을 재해석해 자수에 접목할 수 있을까 고민”했기 때문이다.

민화를 자수로 그대로 옮겨 담은 작품


오직 실과 바늘만을 이용하는 자수는 당연히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50년 외길’을 걸어온 이 명장도 지금까지 200여 점밖에 만들지 못했다. 남들보다 손이 빠르다는 평가를 받는데도 그 정도다. 그는 “가는 실로 작업할 때면 곤충의 눈을 만들고 사람 표정을 표현하는 데만 며칠이 걸리기도 한다”며 “더구나 추상을 할 때면 구상에만 몇 개월이 걸릴 수 있다. 원하는 느낌이 나올 때까지 계속 쳐다봐야 하기 때문에 피로도가 높다”고 설명했다.

이 명장은 자신에게 엄격한 편이다. 몇 개월이나 진행한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해체해 버린 적도 있다. 그는 “조선 시대 대표 풍속 화가인 혜원 신윤복의 작품을 자수로 만들기 위해 몇 개월 동안 작업했는데 어떻게 해도 만족감이 들지 않더라”며 “작품을 만들어야지 ‘잡품’을 만들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건 구걸”이라고 덧붙였다.

이 명장에게 자수란 예술이고 숨 쉬고 사는 것이다. 꽃을 보고 단풍을 즐기면서도 자수의 소재를 생각한다. 시간에 따라 색을 달리 한 4개의 단풍잎도 스마트폰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도 다시 태어나면 자수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힘들어서가 아니다. 똑같은 삶이 지겨울 것 같아서다. 대신 다른 예술 활동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예술은 포도주입니다. 인생을 아름답게 즐길 수 있게 하죠.” 이 명장은 역시 예술가다.
글·사진=송영규 기자
sk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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