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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웨이 위 당당한 나 발견하는 게 진짜 ‘인생 이모작’”

■ 지자체 돌며 강좌 여는 시니어 모델 심광섭씨

청년 모델서 사업가 길 걷다 쉰 앞두고 다시 모델로

안정적 수입 찾아 수업 열어…1년만에 제자 400명

“기뻐하는 제자들 보며 ‘뿌듯’, 계속 가르칠 것”


지난달 30일 서울 금천구 금천뮤지컬센터 공연장. 평소 관객을 위한 약 200개의 좌석이 놓여있는 객석과 무대가 이날만큼은 런웨이로 바뀌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의 어르신들은 음악에 맞춰 꼿꼿한 자세로 걷다 서기를 반복했다. 흰 모자를 눌러쓴 심광섭(50)씨는 움직임을 유심히 지켜보며 “뒤로”, “조금 더 자신 있게” 같은 지시를 이어갔다. 쇼가 진행되는 내내 긴장을 놓지 못하던 심씨는 피날레를 본 뒤에야 환한 미소를 지었다.

금천뮤지컬센터에서 진행한 패션쇼가 끝난 뒤 심광섭씨(왼쪽 아래)와 모델들이 환호하고 있다. 심광섭씨 제공

다른 ‘인생 후반’ 찾다 돌아온 모델의 길


심씨는 약 30년 전 일본에서 활동하던 모델이었다. 런웨이에 설 때가 가장 즐거웠던 그였지만, 런웨이를 비추는 반짝이는 조명만큼 현실이 항상 화려한 것은 아니었다. 고민 끝에 모델을 관둔 그는 다른 진로를 찾았다.

그렇게 20여 년이 흘렀다. 심씨는 1996년부터 운영하던 한 디자인 회사의 대표를 관두기로 했다. “50세 이후의 삶은 지금과는 달리 살고 싶었어요. 다양한 경험을 통해 다른 인생을 살고 싶어 정들었던 회사의 모든 것을 정리했습니다.”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사업을 정리’한 그였지만, 정작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꾸려갈지는 결정하지 못한 채로 시간을 보냈다. 결국 늘어가는 고민과 함께 체중도 20kg가량 늘었다. ‘더 이상 이렇게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한 심씨는 몸무게를 줄이는 과정을 SNS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의 도전은 팔로워를 점점 끌어 모았다. 이들은 그의 도전을 응원하며 “모델 대회에 나가시라”는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 자신감을 얻은 심씨는 ‘2022 더룩오브더이어(The look of the year) 클래식’에 도전장을 냈다. 이 대회는 1020세대들이 주로 참가하는 여느 대회들과 달리 만 40세 이상만 지원할 수 있다.

심씨는 이 대회에서 남성 부문 역대 최고점을 받으며 1위에 올랐다. 그 후 자연스럽게 ‘시니어 모델’로 활동을 시작했다. “대개 50대 이상인 모델을 시니어 모델이라고 해요. 편의상 부르는 말인데, 국내에서만 쓰는 표현이기도 해요. 나이와 관계없이 다 같은 모델인데, 나이대만 ‘시니어 신(Scene)’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표현인 것 같아요.”

모델로 활동하는 심광섭씨. 본인 제공

모델로 활동하는 심광섭씨. 본인 제공


안정적 수입 걱정에 시작한 강의가 ‘천직’으로


약 30년 만에 모델로 ‘금의환향’했지만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수입이 일정치 않은 직업의 특성상 모델 일만으로는 생계를 꾸려가기 어려웠다. 다시 찾은 일을 계속하고 싶었던 심씨는 안정적인 수입을 확보할 수 있는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그렇게 찾은 일이 바로 강의였다. 지난해 3월부터 모델 워킹을 가르치는 부업을 시작한 것. “강의 일도 순탄하진 않았어요. 불러주는 곳이 없었으니까요. 제가 직접 커리큘럼을 만들어서 지방자치단체 복지관 같은 곳에 수업 제안서를 돌렸고 서울시설공단 산하 단체 한 곳에서 연락이 왔어요.”

시작은 힘들었지만,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강의를 시작한 지 2개월 만에 강좌가 늘었다. 지금은 30개 강좌를 이끄는 그. 수강생만 400명에 달한다. 중장년들 사이에 모델에 관한 관심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확인한 셈. 수업을 할 수 있는 장소로 지자체를 찾은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모델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곳은 사실 많아요. 대학에서도 가르치고. 문제는 180만~200만 원에 이르는 수업료지요. 지자체 복지관에서 하는 수업은 상대적으로 낮게 수업료를 책정할 수 있거든요. 시니어 모델을 꿈꾸지만 수업료가 부담스러운 이들에게는 꽤 괜찮은 선택지가 될 수 있지요.”

실제 금천50플러스센터에 개설한 ‘바른 자세와 모델 워킹’ 수업의 수강료는 1만 원이다. 지자체의 지원 덕에 가능한 일이다. 다른 지역에서도 6만~7만 원 정도면 모델 워킹 수업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더 많은 제자들 런웨이로 인도하고파”


심씨가 ‘선생님’으로 불리기 시작한 지 1년. 그에겐 든든한 지원군이 생겼다. 심씨의 모델명인 ‘더 락(The Rock)’을 따 ‘락 패밀리’가 된 그의 제자들이다. 수업을 들은 뒤 시니어 모델 대회에 나가 우승한 제자도 있다. 심씨는 “갑상샘암으로 투병하면서도 수업을 듣던 제자가 있다”며 “서울에서 진행하는 수업에 참석하기 위해 가평에서 매번 찾아올 정도”라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금천뮤지컬센터에서 열린 패션쇼에는 심씨와 락 패밀리들이 모였다. 금천50플러스센터에서 진행하는 수업 수강생 외에도 이전부터 심씨의 수업을 들었던 제자들이 함께 런웨이에 서기로 한 것이다. 이들의 모습을 간직하기 위해 사비를 털어 장비를 대여하고 영상도 찍었다. 다른 패션쇼처럼 의상을 제공받는 것도 아니었고, 메이크업도 손수 해야만했지만 락 패밀리들의 얼굴에는 연신 웃음꽃이 피었다. 쇼를 마친 뒤, 무대에 섰던 모델들은 심씨에게 “고맙다”, “감사하다”며 꽃다발을 안겼다.

금천뮤지컬센터에서 패션쇼가 끝난 뒤 수강생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금천구 제공


이번 패션쇼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덕일까. 다른 지역에서도 쇼를 열어 달라는 섭외가 오기 시작했다. 오는 가을에는 서울 강서구에서 열리는 ‘허준축제’ 무대에 오른다. 12월에는 장애 학생을 위한 자선 바자회 패션쇼도 열 계획이다.

심씨는 시니어들을 위해 모델 수업을 계속 맡을 생각이다. 누군가의 엄마나 아빠로 살던 사람들이 런웨이에서만큼은 오롯이 자신의 이름으로 무대를 즐기며 기쁨과 희열을 느끼는 모습에서 얻는 감동이 크기 때문이다. 그는 “열정이 없어져서 늙는 것이지, 늙어서 열정이 없어지는 게 아니다”라며 “런웨이를 당당하게 걷는 자신을 보며 진짜 ‘나’를 발견하는 진정한 ‘인생 이모작’을 경험해 볼 것”을 당부했다.
마주영 기자
majuyeong@rni.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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