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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간 아동소설 200여 권 써낸 작가, 그 비결은?

■ 초등교사 출신 동화작가 안선모 씨

호기심 넘치고 글 쓰기 좋아하던 소녀, 교대 진학 후 초등교사로

“교실은 영감의 원천, 성실함과 꾸준한 기록 덕분에 소재 충분”

“퇴직했지만 이전과 다르지 않아…내 행복 위해 최선 다 할래”


소녀의 꿈은 세상의 이야기를 글로 기록하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유별났던 호기심, 그리고 글에 대한 막연한 사랑은 자연스레 신문 기자라는 꿈으로 이어졌다. 시간은 흘렀고 소녀는 어른이 됐다. 어른이 된 그에게는 달갑지 않은 장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해 4년제 대학을 진학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결국 그는 오랜 꿈을 가슴 속에 묻고 교육대학에 들어갔다. 대신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찾아갔다. 인천교대 학보사에서 활동하며 기자의 삶을 슬쩍 엿보기도 했고 지방지를 통해 소설가로 등단하기도 했다. 교사가 된 뒤에도 그는 손에서 펜을 놓지 않았다. 약 50년이 지난 지금, 소녀는 200권이 넘는 아동소설을 집필한 작가로 거듭났다. 정년퇴직 후에도 왕성한 작가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안선모(66) 씨 이야기다. 라이프점프는 지난달 28일 안 씨의 수많은 소설들이 탄생했다는 단골 카페에서 교사, 아동작가 두 갈래길 인생사를 들어봤다.

안선모 씨가 라이프점프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연주 기자

기회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


아동작가로 등단한 뒤 매년 평균 7권을 집필했다는 안 씨의 빽빽한 인생을 생각해 보면 그의 인생에는 공백 따위가 용납되지 못할 것만 같다. 예상 외로 그의 인생에도 정지 버튼이 눌린 적이 있었단다. 그는 교직생활 2년 만에 휴직서가 아닌 사직서를 제출했다. 아이양육을 위해서라는 이유를 들었지만 사실 이건 핑계였다고 한다.

“퇴직 후에 다른 세상이 저를 반겨줄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 다른 세상은 그리 달콤하지 않았죠.”

25세에 백수가 된 안 씨는 인생 2막을 꿈꾸며 꽃집을 열었다. 학교의 울타리 속에서만 지내온 그에게 자영업자의 삶은 버겁기만 했다. 결국 꽃집은 5개월 만에 문을 닫았다. 실패로 의기소침하게 있는 것도 하루 이틀,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호기심은 그를 한시도 가만히 두질 않았다. 10년의 공백 기간 동안 중국어에 매진하기도 했고 영어공부를 해보겠다는 일념 하에 1년간 캐나다 오타와에서 지내기도 했다. 퇴직 10년 차에 접어들었을 무렵, 짧게 끝나버렸던 교사의 삶을 다시 연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임용시험을 치렀고 ‘중고 신입’ 교사로 새로운 인생을 맞이했다.

교사의 삶으로 재진입한 안 씨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글에 대한 욕망이 끓어올랐다. 그는 성인을 대상으로 한 소설은 쓰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무엇이든 경험이 바탕이 돼야 탄탄한 글이 나온다는 것이 그의 글쓰기 철학인데 성인이 읽을 만 한 글을 쓰기엔 자신의 경험이 얄팍하고 미천하다고 본 것이다. 고민을 거듭하던 중 동화책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보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으니 동화책 집필에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곧바로 동화책 20여 권을 구매해 동화책을 공부했고 1992년 ‘아동문예작품상’에 당선됐다. 곧바로 마로니에여성백일장에서 우수상을 받았고 MBC창작동화대상, 눈높이문학상 등 아동소설계의 권위 높은 상들도 모두 휩쓸었다. 쏟아지는 출판사의 소설 청탁을 받아내며 정신없이 글을 써 내려가니 30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흘렀다.

교실 안에서 이룬 동화작가의 꿈


교실은 그야말로 영감의 원천이었다. 교실에서 발생하는 에피소드 하나하나는 모두 소설 소재가 됐다. 교직생활과 소설 집필을 어떻게 병행할 수 있었을까. 그는 “글이라는 게 하루 만에 불붙어 화르르 써지는 것이 아니다”라며 “결국 모든 것은 ‘루틴’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초등교사 시절부터 퇴직한 지금까지도 그의 일과는 철저히 계획된 루틴을 따라 진행된다. 초등교사 시절 그녀는 매일같이 오전 7시에 출근해 가장 먼저 교문을 열었다. 이때 생기는 1 시간의 여유시간은 집필활동에 할애했다. 퇴근도 1시간 미뤘다. 취미로 비올라를 연습하기 위해서였다. 루틴으로 쌓은 시간은 점점 늘어났고 매일의 일상은 점점 단단해져갔다.

작가, 교사, 꽃집 사장 등 수많은 직함을 거쳐 온 그다. 그의 정체성이 어디에 가장 기울여있냐는 질문에 그는 일체의 고민 없이 교사라고 답했다. “아이들을 만날 때 가장 행복하고 신이 나요.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아동작가 안선모가 존재하는 거죠”

어린이들을 향한 편견 없는 애정은 다작의 비결이기도 하다. 동료 교사들이 다문화 혹은 사회 취약계층 학생들을 꺼릴 때 안 씨는 오히려 설렘에 잠을 못 이뤘다. “저 아이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지금 심정은 어떨지 진심으로 궁금했어요. 세상에 나쁜 어린이는 없거든요.”

세상을 순수하고 올곧게 바라보는 안 씨의 시선은 그의 작품 활동을 더욱 풍성하게 일궈냈다. 다문화 학생을 지도하며 집필한 ‘꼬마 난민 도야’을 비롯한 저서 대다수는 학생들을 향한 애정 어린 시선에서 탄생했다.

안선모 문학관 내부 모습. 안선모 씨 제공.


안 씨는 ‘계획의 여왕’답게 정년퇴직 5년 전부터 교사 이후의 삶을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다. 그는 교사의 인생이 끝이 나더라도 여전히 아이들에 둘러싸여 소통하고 싶었다. 그 일환으로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었던 그는 경기 포천에 있는 남편의 농장 부지에 부엉이 도서관과 안선모 문학관을 설립했다. 도서관에는 대학 시절부터 모은 책 5000여 권을 차곡차곡 쌓아뒀다. 아울러 도서관에는 아이들이 흥미로워할 요소들도 가득 만들어뒀다. 안선모 문학관에는 저서 200여 권과 미술작품, 작가들과 주고받은 서신 등 안 씨의 모든 역사가 전시돼 있다. 도통 그 무엇도 버리지 못하는 그의 수집 병이 빛을 발한 공간이기도 하다.

올해로 퇴직 4년 차인 그는 올해 상반기에만 아동소설 2권을 펴냈다. 책을 집필하는 동시에 문학상 심사위원, 도서 강연 등 쏟아지는 일거리를 모두 소화해 냈다. 일상이 쉴 틈 없이 바빠 퇴직 후에 공허함을 느낄 새도 없단다. 교실 밖을 떠난 지 수년이 지났는데도 그의 머릿속에서 어떻게 아이디어가 무한히 솟을까. 비밀은 그가 1992년부터 작성한 수첩에 있다. 아동소설 집필을 시작했을 때부터 그는 매일 수첩에 일과와 소설 아이디어를 빼곡히 기록해뒀다. “이미 소설 소재는 충분해요. 아이디어가 고갈되면 언제든 수첩을 뒤적거리면 그만이죠. ‘기록의 힘’을 매번 실감합니다.”

30년 간 모은 안선모 작가의 아이디어 수첩. 안선모 씨 제공.

“행복, 뒤로 미루지 마세요”


퇴직, 대단한 무언가를 계획해야 할 것 같이 무게감이 느껴지는 단어다. 왠지 퇴직 후에는 전혀 생각해본 적 없는 분야에서 화려한 인생 2막을 열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으레 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안 씨는 퇴직 전과 퇴직 후가 왜 달라야 하냐고 반문한다. 자신은 그저 글쓰기를 좋아했고 흘러가는 대로 이 행위를 확장해 나가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안 씨는 본인의 활동적인 삶은 ‘행복을 유예하지 않는 자세’에서 나왔다고 강조했다. “자식을 독립시킬 생각 말고 먼저 본인이 자식에게서 독립하세요. 그동안 가족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면 이제는 본인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세요.”

퇴직, 새로운 시작은 맞다. 그러나 안 씨는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고 해서 전혀 다른 옷을 입을 필요는 없다고 조언한다. 그저 내가 찍은 점에서 선 하나를 그어나가면 그만이라고. 이런 의미에서 그녀의 인생에서 ‘퇴직’은 없다. 잠깐의 쉼표만 있었을 뿐, 그녀의 인생은 지금도 거미줄처럼 무한 확장 중이다.
이연주 기자
juya@rni.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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