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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당신, 카페도 도서관도 지겹다면···“‘나날’에서 책읽고 차마시며 또래와 교류해요”

■ 한상수 시니어 공간 나날 대표

영국의 자생적 공부 모임 ‘u3a’이 모델

함께 공부·일거리 찾는 커뮤니티가 목표

"카페보다 편하게…윤택한 삶 만들어요"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죠. 금세 질려요.”

은퇴자라면 열에 아홉은 동의할 만한 얘기다. 등산, 독서 등 현역일 때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했던 취미가 은퇴한 뒤에는 시간을 때우려 마지못해 하는 것으로 전락하곤 한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다는 이유로 친구가 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뛰어놀던 추억 속의 놀이터. 어른들에게도 그런 공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런 공간을 지향한다는 곳이 있다. 라이프점프는 “'공간'으로 은퇴 시니어가 새로운 일상을 꾸릴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시니어 공간 나날(이하 나날)’의 한상수(59) 대표를 만나 공간을 꾸리게 된 계기와 목표 등을 들어봤다.

시니어 공간 나날과 행복한아침독서의 한상수 대표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예지 기자


어린 시절 한 대표는 유독 책에 관심이 많았지만 1970년대의 경기 파주시 문산읍, 작은 마을에서 책은 귀하디귀했다. 학교에는 도서관이 없고, 동네에 공공 도서관도 없다 보니 그는 중학생 형의 사회과부도 교과서를 빌려 읽으며 책에 대한 갈망을 달래야만 했다.

그의 어린 시절의 경험은 인생 2막 전환으로 이어졌다.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그는 회사에 다니고, 두 아이를 키우면서도 1999년 동녘작은도서관, 2002년 푸른꿈도서관 등 고양시에 두 곳의 어린이 도서관을 열었다. 2004년에는 ‘어린이도서관연구소(현재의 사회적기업 행복한아침독서)’을 설립했다. 도서관을 찾기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아침 자습 시간에 다 함께 독서하자는 ‘아침독서운동’도 전국 초중고교 대상으로 벌이고, 학급 전체에 무료로 책을 대여하며 독서 환경을 바꿔왔다.

“어린이 도서관을 세울 때의 마음으로 나날을 설립하는 거예요. 총 954만 명의 2차 베이비붐 세대(1964~1974년생)가 은퇴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사회에 그들을 위한 공간이 필요합니다.”

시니어 공간 나날 한편의 시니어 도서관. 정예지 기자


경기도 파주시 와동동, 운정역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지난달 25일 오픈한 나날은 소정의 이용료를 내고 공부를 하거나 컴퓨터 작업 등 각자 할 일을 하는 스터디 카페와 유사하다. 나날의 하루 입장료는 1만 원, 한 달 이용료는 10만 원이다. 카페와는 달리 하루 입장료를 냈다면 당일 언제든지 재입장 할 수 있다. 커피와 차, 시니어를 위해 직접 큐레이션 한 책 200여 권, 20개의 좌석도 마련됐다.

“서울에는 서울시50플러스센터가 있지만 아직 파주에는 그런 공간이 없어요. 노인복지관이 있지만 5060은 주요 서비스 대상이 아니죠.”

그가 참고한 모델은 영국의 ‘University of 3rd age(이하 u3a)’다. 한 대표에 따르면 영국은 생애를 4단계(0~25, 26~50, 51~75, 76~100세)로 나눈다. u3a는 50~75세, 즉 인생 3막을 맞은 시니어들의 전국 커뮤니티다. 1982년 시작된 u3a는 현재 회원 수 약 40만 명을 보유한 단체로 성장해 연령차별 근절이나 시니어들을 위한 정책에 목소리를 내고 있다.

무엇보다 u3a에서는 각자 관심이 있거나 전문성이 있는 분야에서 시니어들이 자생적으로 공부 모임을 연다. 연간 회비 20파운드(약 3만 5000원)와 온라인 커뮤니티 연간 회비 12파운드(약 2만 1000원)를 합해 연 5만 6000원 정도면 활동이 가능한데, 공부 모임이 전국에 1000개에 달하고, 범죄소설 읽기와 영화 리뷰, 지질학 스터디 등 분야도 다양하다.

시니어 공간 나날과 행복한아침독서의 한상수 대표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예지 기자


“나날도 커뮤니티 활동을 중요시해요. 책을 좋아하면 나날의 다른 중장년과 독서 동아리를 만들 수 있겠죠. 퇴직 기자가 온다면 뜻을 맞춰 고급 정보만 전하는 시니어 신문도 만들 수 있겠고요. 어떤 분들이 모이는 지에 따라 나날 방향성도 달라질 거예요.”

한 대표는 나날 하루 이용료나 차비가 부담스러울 시니어를 위해 소일거리도 제공할 계획이다. 그가 대표로 있는 행복한아침독서에서 외주로 처리하던 마크 장비 작업(도서 데이터베이스 구축, 바코드 부착 등)을 나날을 찾는 구직자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날에서 제공할 일자리는 아직 많지 않다. 무료로 개방된 도서관이나 저렴하게는 1500원으로도 이용할 수 있는 카페처럼 나날이 아니어도 시니어가 찾을 수 있는 공간은 이미 도처에 있다. 이들과 나날의 차별점을 묻는 질문에 한 대표는 ‘지속가능성’을 꼽았다.

“도서관에 가 하루 종일 혼자 책 보고, 밥 먹고 돌아오는 일상은 지속할 수 없어요. 카페는 오래 있지 못하고요. 나날에는 문 열 때 오셔서, 함께 문 닫고 가셔도 돼요. 공부하다 비슷한 처지의 또래 만나 산책도 잠깐 하는 거죠. 같이 봉사를 가도 되고요. 함께 하면 시간이 빨리 갑니다. 그러면 그다음 날 일어나서 ‘오늘은 뭐 하고 지내지’하는 고민을 덜 하게 돼요.”

나날의 목표는 공간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사람과 일을 연결이라는 것. 공간 이름도 은퇴 후 무력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닌 나날이 새로워지자는 뜻에서 나날로 지었다고 한다.

시니어 공간 나날과 행복한아침독서의 한상수 대표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예지 기자


한 대표는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을 꼽았다. 책은 한 노인이 황폐한 마을에 30년간 매일 도토리 열매를 심었더니, 나무가 자라 어느덧 풍요로운 숲을 이뤘다는 내용으로 ‘선한 의지로, 꾸준히 하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그의 신념과도 일맥상통한다. 50년 전 교과서를 제외하고는 읽을 책이 없었던 그의 고향 파주시에는 공공 도서관이 21개, 어린이 도서관이 한 곳도 없었던 고양시에는 공공 어린이 도서관이 3개가 들어섰다. 나날로 지역에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가 바라는 건 편하게 올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것.

“카페나 도서관 갈 때 용기 내서 가지 않잖아요. 카페에 간다고 생각하고 나날에 오시면 좋겠어요. 자율적인 커뮤니티 활동으로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거죠.”


정예지 기자
yeji@rni.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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