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바뀔 수 있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책을 쓰는 일은 인생을 얼마나 더 변화시킬 수 있을까. 사연 없는 인생 없고, 모든 이의 인생은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중장년 서른 명이 매일 밤 모여 글을 적었다. 그렇게 두 달 뒤 80권의 전자책이 나왔다. 라이프점프는 지난 15일 이 모임을 이끄는 민선하(49) 씨를 만나 책을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20년 전 우유 대리점을 운영하던 민 씨의 남편은 교통사고로 뇌 손상을 입고 7세 아이처럼 말하고 행동하게 됐다. 주부였던 민 씨는 운전면허를 딴 뒤 우유 대리점을 도맡고 남편 돌봄과 세 아이의 육아도 책임지게 됐다.
세월이 흘러 몸을 회복한 남편이 다시 일을 시작했지만 2021년 운전 중 발작으로 다시 교통사고를 냈다.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4중 추돌이라는 큰 사고를 수습하고 나니 민 씨의 통장에 찍힌 잔액은 100만 원 남짓, 민 씨의 나이 46세였다.
막내가 스무 살이 돼 그도 인생 2막을 새롭게 시작하려던 시점에 일어난 사고였다. 이번에는 다시 일어설 힘이 없었다. 민 씨는 우울함과 불안함을 떨치기 위해 매일 새벽마다 독서와 명상을 함께 할 온라인 커뮤니티를 시작했다.
“피해의식이 있었나 봐요. 제 이야기는 일절 안 했죠. 그런데 용기를 내 제 이야기를 한번 꺼내니 다른 사람들도 아픈 속내를 이야기하더라고요. 공감이 위로와 힘이 됐어요. 나를 직면하고, 인생을 긍정하게 됐지요. 우리 삶을 글로 풀어보고자 책을 쓰기로 했어요.”
그는 올 가을 그가 운영하던 온라인 커뮤니티 일원 100명 중 30명과 함께 책을 쓰기로 하고, ‘나찾기’라는 이름의 출판사도 세웠다.
나찾기라는 그 이름처럼 저마다 힘들었던 경험을 꺼내 직면하고, 인생 2막을 새롭게 꾸려가려는 이들이 책을 썼다. 그중 최고령 작가는 84세의 임한수 씨다. 며느리 박성현 씨가 먼저 책을 쓰고, 시어머니 임 씨에게 지난 인생을 담아 책을 써보시라 제안했다.
임 씨가 글로 풀어낸 사연은 박 씨 부부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임 씨의 책 ‘세월의 바람, 마음에 남은 흔적’은 일제 강점기와 광복,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이 담긴 한 권의 역사책 같았다.
부잣집 딸로 태어나 6.25 전쟁이 일어나자 가족이 흩어지고 피난 생활했던 것, 남편이 베트남 전쟁에 파병돼 아이들과 홀로 지냈던 것, 건빵 공장부터 시작해 잼, 벽지, 꽃 공장에 다니고 아파트 청소 일을 하며 아이들을 키워낸 시절 등 세상사의 부침과 함께한 임 씨의 삶이 담겨 있었다.
임 씨가 손으로 적으면 초등학생인 손자가 컴퓨터로 옮겨 담았다. 그 과정에서 온 가족이 임 씨를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민 씨도 어머니 윤금자 씨가 글을 써 책을 낼 수 있도록 도우며 어머니를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목소리로 녹음한 파일을 보내면 민 씨가 받아적는 식이었다. 어머니가 보낸 녹음본에는 아이 3명을 하늘나라로 보내고, 막내아들을 얻기 전까지 딸 여섯을 낳아 늘 구박데기로 살았던 젊은 시절의 윤 씨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어머니는 항상 ‘내가 죄가 많다’고 하셨어요. 그런 어머니를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었어요. 함께 책을 쓰다 보니 엄마의 인생사를 알게 됐고, 모든 게 이해됐어요.”
민 씨는 어머니의 책을 ‘복많은 금자씨’로 이름 지어 드렸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는 쉽게 하기 힘든 이야기를 책으로 내기도 했다. 조손가정에서 자란 이상미 씨가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쓴 ‘할머니와 나’, 시어머니가 된 입장에서 자신의 시어머니에 대한 감사함과 추억을 그려본 서영아 씨의 ’치매 시어머니를 통해 나를 만나다‘, 포장마차와 백반집 등을 하며 자녀를 위해 버텨온 시간을 담은 서정례 씨의 ‘75년의 시간을 잘 살아줘서 고마워’ 등이다.
이들은 ‘책에 인생을 담았더니 비로소 과거에서 해방돼 인생 2막으로 나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민 씨는 함께 한 중장년의 후기를 듣고 “두 달간 어떤 ‘사고’를 친 건지 제대로 깨달았다”고 말했다. 민 씨는 더 많은 중장년이 이러한 변화를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의 중장년 생애전환교육 ‘인생디자인학교’ 수업을 듣고, 코치들의 조언을 들으며 사업으로 구체화하기로 결심했다.
이번에 출간한 대부분의 책이 10~20 페이지 남짓한 짧은 글이지만 혼자만의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아닌 책으로 쓰게 한 것은 내 이야기를 꺼내는 용기가 변화의 원동력이라고 민 씨는 믿는다.
“그냥 놓여 있는 과일과 바구니에 담겨 포장된 과일이 같을 수가 있나요. 책을 쓴다는 것은 내 삶을 책이란 바구니에 담아 선물로 만드는 것과 같아요. 여러분들도 꼭 책을 써보시기를 바라요. 나를 직면하는 용기가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요.”
- 정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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