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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으로 돌아온 입양아들의 초상

박유아 회고전,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자기 삶 개척한 해외입양아 초상 연작

아버지 故박태준 초상그린 '르상띠망-효' 등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서 한창인 박유아 개인전 '단순한 진심'을 통해 한인 입양아를 그린 작가의 '위버멘쉬' 초상화 연작이 전시 중이다. /조상인기자


“웰컴 백 투 유어 마더랜드(Welcome back to your Motherland). 모국에 돌아온 것을 환영합니다.”

전시장의 불을 켜며 작가 박유아(60)가 나직이 속삭였다. 자신이 그린 47점의 초상화들을 향해서다. 그 목소리가 돌아온 자식들을 맞는 어머니 만큼이나 다정하다. 중년의 동양인 남성을 그린 작품 제목은 ‘60/60US’. 1960년에 태어나 같은 해 미국(US)으로 입양된 인물이라는 의미다. 그 옆 여성 초상화는 ‘68/70DNMRK’이니 1968년에 태어나 1970년에 덴마크로 입양됐다는 뜻이다. 작품 속 주인공은 모두가 해외 입양아들이다. 작가가 말한 ‘웰컴’은 이 땅을 떠나야 했던 그들에 대한 ‘진심’이다.

현대미술가 박유아가 자신의 개인사를 직면하고 작업한 과거작품과 해외 입양을 통해 직시하게 된 가족주의에 대한 신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조상인기자


뉴욕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는 박유아의 회고전 ‘단순한 진심’이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전관 전시로 열리고 있다. 전시 제목은 기지촌 여성과 한국의 해외 입양을 소재로 한 조해진의 동명 소설에서 빌려왔다. 지난달 15일에 개막했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재확산으로 그동안 미술관이 문을 닫은 탓에 19일부터 예약제로 정상 관람이 가능해졌다.

화가와 그림 속 인물들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한국계 다큐멘터리 감독인 글렌 모리 부부가 2018년 발표한 한인 입양아 100인의 이야기 ‘사이드 바이 사이드(Side by side)’를 통해서다. 각자의 삶은 개인사임에도 저마다 사회적 문제들을 품고 있었고, 지금도 어디서나 벌어질 법한 이야기였기에 보편적 공감을 얻기 충분했다.

“남의 이야기 100편을 눈물 쏟아가며 다 본 후 나의 감정이입을 되짚었어요. 각각의 삶에는 누구나 감정이 이입될 수 있는 지점이 있음을 확인했죠. 여기 수십 점 초상화 속에서 아는 얼굴 한둘을 찾아내는 것처럼요. ‘위버멘쉬’라는 이름으로 한국계 입양아 초상화 연작을 시작했습니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사용한 ‘위버멘쉬’는 초인으로 번역된, 자신을 극복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이들과 닮았기 때문이죠."

박유아의 작품 '60/60US'(왼쪽부터), '68/70DNMRK','88/88US'


모리 감독에게 연락해 작업했지만, 인물들을 만나거나 개인정보를 알려 하진 않았다. 최대한 객관적 태도를 유지하며 그리기 위해서다. 제목이 말하듯, 이들은 이름 없는 삶에서 오롯한 자기 힘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며 성장했다.

이화여대와 동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박유아는 미 컬럼비아대, 하버드대에서 유학하고 1990년대 말 아예 미국으로 건너갔다. 여전히 장지에 분채로 작업하는 그는 붓칠하고 말려 다시 칠하기를 수십 번씩 반복하며 초상화 속 인물의 얼굴을 쓰다듬듯 어루만졌다. 그림은 완성 후 주인공들에게 보여줬다. 지난해 ‘여수국제미술제’에 초청돼 이들 작품 일부를 처음 국내에 선보였으나, 몇몇 당사자들이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다고 해 검은 천으로 가려진 채 전시되기도 했다. 이번 출품작은 모두 초상권 동의를 얻은 것들이다.

초상화의 사연은 건물과도 공명한다. 1905년에 서양식 고전주의로 지어진 옛 벨기에영사관은 애초의 영사관에서 일본 해군성 관저와 해방 후 해군헌병대 청사로 사용되다 은행 소유가 됐고, 위치도 회현동에서 충무로로 통째로 옮겨갔다가 1982년 지금 위치로 이전 복원됐다. 태생과 성장의 기구한 운명 끝에 미술관으로 제자리를 찾은 모습이 입양돼 성장한 그림 속 주인공과 닮았다.

박유아의 2012년작 '르상띠망-효' 설치장면. 우측 초상화 속 인물은 화가의 아버지인 고(故) 박태준 포스코 창업주이다. /사진제공=서울시립미술관


2층 전시장에는 작가의 과거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작가는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사용한 ‘르상띠망’을 우리의 효(孝)와 연결 지어 개인사를 풀어냈다. ‘르상띠망-효’는 거울로 만든 저녁 식탁에 인주로 그린 가족 초상화를 자리에 배치하고, 얼굴에 붉은 칠을 한 작가가 핏빛 생고기를 잘라 나눠 먹는 시늉을 하는 2012년작 퍼포먼스다. 붉은 인주로만 그렸지만 포스코 창업주인 그의 아버지 박태준(1927~2011) 전 국무총리의 얼굴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다. 작가는 “니체가 신과 인간의 관계에 붙인 르상띠망이 우리의 절대 가치인 효와 통한다고 생각했다”면서 “소위 ‘밥상머리 교육’이 이뤄지는 저녁 식탁을 반추하고 퍼포먼스 마지막에는 거울을 깨뜨려 지나간 나의 행동을 부순 이 작품이 ‘가족 시리즈’의 첫 작업”이라고 소개했다. 전시장에는 부서진 거울 조각들이 보석처럼 빛을 내며 놓여 있다.

박유아 작가가 2012년 '르상띠망-효' 연작으로 작업한 퍼포먼스 '미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조상인기자

박유아의 2013년작 '미스터 앤드 미세스 고(Mr. & Mrs. Koh)' /사진제공=서울시립미술관


작가는 부모자식의 관계를 털어낸 후 부부 혹은 커플로 주제를 돌려 자신의 삶을 치유했다. 부부의 화목했던 사진 속 장면에서 얼굴만 흰 칠로 도려낸 ‘미스터 앤드 미세스 고’ 연작이다. “나의 과거를 비웃듯 그렸다”는 작가는 “그릇, 꽃 등 주변 사물을 공들여 그린 반면 얼굴을 지워 누구나 그 안에 자신을 대입할 수 있게 했다”는 설명이다. 구작 사이 곳곳에는 근작인 ‘위버멘쉬’의 입양아 초상들이 걸려 전통적 가족의 의미와 새로운 가족 유형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전시를 개막하고도 코로나19 확산으로 관람객을 맞지 못하는 상황을 안타까워 하던 작가는 지난달 말 뉴욕으로 돌아갔다. 전시 기간은 2월 말에서 4월 11일까지로 연장됐다.

/조상인 기자 ccsi@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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