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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休]성남 판교 말고 서천 '판교'를 아시나요···마을 자체가 문화재인 '시간이 멈춘 마을'

충남 서천 판교면 현암리 '판교마을'

문화재청, 마을 통째로 등록문화재 지정

극장, 방앗간, 주조장, 사진관, 촌닭집

30~70년대 옛 농촌마을 풍경 간직해

장항선 판교역 들어서면서 번성하다

도로 뚫리고, 역사 옮겨가며 쇠락해

과거로 타임머신 타고 돌아간 풍경

판교마을 ‘촌닭집’ 앞을 주민들이 지나고 있다. 이 건물은 최초 대서방으로 시작해 양품점·만화방·한의원·건강원 등을 거쳐 마지막으로 닭집으로 운영됐다.


보령과 서천의 경계 그 어디 즈음, 철로와 도로조차 멀찌감치 비켜갈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곳. 100년 가까이 된 주조장과 언제 문을 닫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사진관, 추억 속 통닭집까지 빛바랜 사진 속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 펼쳐지는 곳. 충남 서천에는 적어도 반 세기 이상 시간이 멈춘 마을이 있다. 겹겹이 쌓인 세월의 흔적이 풍경처럼 펼쳐지는 추억 여행지, 서천 ‘판교마을’이다.

요즘 ‘판교’ 하면 으레 경기도 성남 판교동을 떠올리지만 30~40년 전만 하더라도 전국에서 가장 ‘잘나가던’ 판교는 서천 판교면이었다. 지난 1930년 마을 한복판에 장항선 판교역이 들어서면서 인근 판교리에 있던 면사무소·우체국·경찰서 등 관공서가 모조리 판교면 현암리로 옮겨왔고 그 주변으로 상권이 형성되면서 ‘초역세권’ 입지를 기반 삼아 마을은 한순간 일대 중심지로 떠올랐다.

오래된 시골 마을은 ‘시간이 멈춘 마을’이 됐다.


성장만큼이나 위기도 한순간에 찾아왔다. 1970년 후반까지 번성하던 역전 마을은 멀리 4차선 도로가 뚫리고 2008년 장항선 직선화 사업으로 판교역마저 다른 곳으로 옮아가면서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한때 8,000명에 육박하던 판교면 인구는 지난해 8월 기준 2,000명으로 쪼그라들면서 소멸 위기에 직면해 있다. 면 소재지인 판교마을 인구은 200여 명에 불과하다.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간 마을은 전성기를 누리던 그 시절을 놓지 못하는 듯 시계를 거꾸로 돌린 것처럼 오래된 흔적을 그대로 품고 있다.

1960~1970년대 영화와 공연이 열리던 판교극장은 텔레비전 보급과 인구 급감으로 문을 닫았다.


시간 여행의 출발지는 과거 판교마을 번영의 상징이었던 판교극장이다. 마을에 영화관이 들어선 것은 1961년이다. 당시 군 소재지에나 하나 있을 법했던 극장이 옛 판교역 바로 옆에 2층 건물로 세워졌다. ‘공관’으로 불리던 극장 건물의 용도는 새마을운동 홍보가 주목적이었지만 마을의 문화생활을 책임지는 유일한 공간으로 영화 상영부터 유명 가수들의 공연, 콩쿠르까지 모두 이곳에서 열렸다. 영화가 개봉하는 날이면 멀리 부여·공주·보령 등 주변 도시에서도 찾아올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판교극장에는 아직도 과거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사진은 ‘꼬마 신랑’ 등 1970~1980년대 영화 포스터(사진 왼쪽)와 매표 창구.


당시 최고의 문화 공간인 극장 주변으로 자연스럽게 상권이 형성되면서 판교극장은 주변에서 인구를 빨아들이는 역할을 했다. 영화와 공연을 감상한 관람객들은 밤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이다 기차를 놓쳐 주변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주변 마을의 부러움을 사던 극장은 1970년대 텔레비전 보급과 함께 하향길로 들어섰다. 극장으로서의 쓰임을 다한 판교극장은 브루스 리와 청룽(재키 챈) 영화가 인기를 끌던 1970~1980년대에 쌍절곤·호신술을 가르치던 체육관으로 쓰이기도, 마을회관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지금은 버려진 이 건물에는 작은 구멍으로 입장권을 내주던 매표소부터 유리창에 붙은 문구까지 세월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옛 판교 역사 앞에 설치된 판교역 조형물. 옛 판교역은 2008년 인근에 신역사가 들어서면서 허물어졌다.


판교극장 바로 옆은 마을의 성장을 이끈 옛 판교 역사(驛舍)다. 1930년 11월 1일 문을 연 판교역은 장항선 웅천역과 서천역 사이 보통역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장항선 직선화 작업으로 2008년 11월 판교역이 1.3㎞ 떨어진 저산리로 옮아가면서 옛 역사는 수명을 다했다. 역사가 철거된 자리에는 지역 특산 먹거리를 판매하는 ‘판교 특화음식촌’이 들어섰다. 이제 옛 역사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역 광장에는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심었다는 소나무와 오래된 상점 등 주변 풍경이 예전 그대로 있다. 건물 한편에는 옛 판교 역사를 본떠 만든 조형물도 세워졌다.

이용객의 편의를 위해 옮아간 신판교 역사도 위기를 겪기는 마찬가지다. 하루 수백 명에 달하던 이용객이 매년 줄어들어 지금은 연간 이용객이 100명도 안 되는 간이역으로 격하됐다. 그래도 하루 20여 편의 열차가 오가는 판교역은 여전히 판교의 관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신역사는 옛 판교역의 모습을 본떠 내부 천장을 돔 형태의 스테인드글라스로 꾸몄고 광장에는 판교의 옛 지명인 ‘너더리’를 알리는 기념비가 서 있다.

옛 장미사진관 건물은 일제강점기 지어진 적산가옥이다. 광복 이후 수차례 주인이 바뀌면서도 외형은 그대로 유지됐다.


마을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시장 입구에 자리한 옛 장미사진관이다. 1932년 일본인 손으로 지어진 이 적산가옥은 마을에서 유일한 2층 목조 주택이다. 지금으로 치면 판교마을의 랜드마크다. 분지인 판교마을은 일제강점기에 농지가 부족해 쌀 수급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당시 이곳에 거주하던 일본인 지주는 집 앞에 서서 일본어로 일왕을 찬양하며 만세 삼창을 외쳐야 쌀을 빌려줬다고 한다.

장미사진관이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 이야기다. 광복 이후 여인숙, 쌀 상회 등으로 운영되다가 사진관으로 바뀌었다. 마지막으로 사진관이 폐업한 뒤 수십 년간 방치되다시피 했다. 용도가 수없이 바뀌면서 건물 외관은 손상됐지만 내부는 지어질 때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 1층 일부분은 지금도 살림집으로 쓰이고 있다.

장미사진관 건너편은 닭집이다. 주민들에게 ‘촌닭집’으로 불리는 이 건물 역시 한때 중심 상권이었다. 최초 면사무소 옆 대서방으로 시작해 양품점, 만화 가게, 한의원, 건강원 등을 거쳐 마지막으로 내걸린 상호가 닭집이다. 건물 입구에 ‘생닭’ ‘통닭’ ‘백숙’과 ‘건강원’이라는 색 바랜 문구가 이 건물의 역사를 짐작케 한다. 적어도 20여 년 전에는 닭집마저 문을 닫았다. 건물은 겉으로는 보기에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서 있지만 뒤쪽으로 마을의 유래가 된 검은 바위 현암(玄巖)이 받쳐주고 있어 아직까지 건재하다.

동일정미소는 주조장에 쌀을 대기 위해 세워졌다. 정미소가 문을 닫은 뒤 외벽에 그림이 그려졌다.

동일정미소 벽에 붙은 관희요율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동일정미소는 영화 ‘오! 문희’의 촬영지다.


판교마을의 입구는 옛 주조장 자리다. 1932년 영업을 시작한 ‘동일주조장’은 이 지역 최고의 부호가 운영하던 술도가였다. 밀주를 단속하던 보릿고개 시절에 밀 막걸리를 제조해 판매하다가 통일벼 보급으로 쌀 수급이 원활해지자 쌀 막걸리를 내놓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원활한 쌀 수급을 위해 정미소를 함께 운영했다. 바로 앞에 우시장과 오일장이 열렸으니 술 판매량이 어느 정도인지 어렴풋이 짐작해볼 수 있다. 동일주조장 2대 사장은 바로 옆 판교중학교 설립자이기도 하다. 3대가 대를 이어 운영하던 주조장은 2000년 문을 닫았다. 마을이 쇠락한 뒤에도 마지막까지 본업을 지켜온 셈이다.

한 때 사람들로 북적이던 판교 오일장. 장이 열리는 날에도 예전 같은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판교 우시장 자리는 농협 건물이 들어섰다. 옛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담벼락에 소 그림을 그려 넣었다.


마을을 유심히 둘러보다 보면 건물 외벽에 적힌 두 자릿수 전화번호가 눈에 띈다. 두 자릿수 전화번호는 전화교환원이 있던 시절 이 마을에 총 100개 안쪽의 전화가 개설됐다는 의미다. 마을 중심도로를 따라 1번부터 80번대까지 각각의 번호가 부여됐는데 오래된 건물마다 주소 대신 이 번호가 더 크게 적혀 있다. 빈집이 늘면서 중간중간 번호가 사라졌지만 아직도 그때 번호를 사용하는 곳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적어도 50년 이상 자리를 지키고 살았다는 증거다. 현재 지역번호를 포함한 총 10자리 전화번호 중에 7, 8번째 번호가 과거 교환원이 있던 시절에 부여된 번호다.

1930년대 지어진 삼화정미소는 오씨가 운영했다고 해서 ‘오방앗간’으로 불렸다.

‘선진소방구현’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옛 판교소방서 건물.


판교마을은 그 흔한 카페도 하나 없을 정도로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해 10월에는 옛 판교역 주변으로 형성된 상권 2만 2,965㎡가 통째로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 문화재로 지정된 ‘구 중대본부’ ‘구 삼화정미소(오 방앗간)’ 같은 건물 외에도 ‘구 소방서 건물’, 우시장 인근에서 수십 년간 영업해온 소머리국밥집 ‘중앙식당’, 판교마을의 역사를 전시한 ‘현암갤러리’ 등 옛 흔적을 간직한 곳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판교마을의 행정지명은 현암리다. 마을에 역이 생기면서 면소재지가 판교리에서 현암리로 바뀌었고, 이때부터 판교마을로 불렸다. 사진 속 창 밖 바위가 바로 마을 유래가 된 검은 바위 현암이다.


현재 판교마을은 문화체육관광부 ‘폐산업시설 유휴공간 문화재생사업’에 선정돼 리모델링을 추진하고 있다. 판교극장은 복합 문화 공간으로, 장미사진관은 마을 기록관으로, 촌닭집은 카페 기능을 가진 편집 숍으로의 변신을 앞두고 있다. 날 것 그대로의 옛 시골마을을 만나보고 싶다면 지금 서둘러 찾아가야 한다.
글·사진(서천)=최성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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