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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빈곤의 상흔 위에...여성을 위한 열린 공간

[건축과 도시] 스페이스살림

도시와 소통하는 건물

대방동 미군기지·여성보호소 자리

여성창업 지원·복합문화공간 변신

1층 출입구만 4곳...어디든 연결

한옥문법에 더 가까운 건축

곳곳에 빈터...비움과 채움 조화

지하도 볕 잘들게 선큰구조 활용

더불어 사는 삶 구현

이용자 필요따라 공간변화 가능

완만한 경사 램프 등 약자 배려

서울 동작구 대방동의 미군 기지 ‘캠프그레이’ 부지에 세워진 여성 가족 복합 공간 ‘스페이스살림’. 건물의 전면부는 6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대방역을 마주하고 있으며 후면부는 주거지역과 맞닿아 도시와 마을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사진 제공=texture on texture 신해수


건축물은 자리잡은 장소와 맥락을 같이할 때 더 강한 힘을 갖는다. 6차선 대로를 사이에 두고 지하철 1호선 대방역과 마주보고 있는 ‘스페이스살림’은 여성을 위한 창업 지원 공간이자 복합 문화 공간이다. 스페이스살림이 뿌리 내린 땅에는 고단한 여성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한국전쟁 초기 격전지였던 이곳은 전쟁 이후 미군 기지 ‘캠프 그레이’가 있던 자리다. 옆에는 오갈 데 없는 부랑 여성을 임시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설립된 서울시립부녀보호소가 36년간 자리를 지켰다. 한국전쟁과 빈곤이라는 무거운 역사를 견뎌온 땅 위에 여성을 위한 건축물이 세워 올려진 것이다.



◇생활 가로가 건축 공간으로 연결…모두에게 열린 건물=스페이스살림은 현실의 장벽에 부딪혀 일자리를 놓아야 했던 여성들을 위한 창업·문화 공간이다. 그런 만큼 스페이스살림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은 ‘평등’이다. 모두에게 열려 있는 건물이다. 입구에서 출입증을 찍거나 음료나 식사 값으로 일정한 비용을 지불해야만 이용할 수 있는 요즘의 건물과 달리 스페이스살림은 내부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사람이든, 단순히 길을 지나가던 보행자든 누구나 ‘물 흐르듯’ 건물로 들어오고 나갈 수 있다.

경사지에 자리잡은 스페이스살림은 기울기 24분의 1의 완만한 경사로로 한 개층 높이의 단차를 극복했다. /사진 제공=texture on texture 신해수


스페이스살림이 이처럼 열린 공간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건물을 둘러싼 크고 작은 생활 가로가 자연스럽게 건물로 이어지게끔 설계했기 때문이다. 스페이스살림의 전면부는 대로를 면하고 있고 후면부는 아파트 단지와 빌라촌이 있는 주거지를 접하고 있다. 건물 자체가 ‘도시’와 ‘마을’을 연결하는 통로인 셈이다. 그래서 거의 모든 방향에서 건물을 통과할 수 있게끔 열린 형태를 구상했다는 설명이다. 스페이스살림을 설계한 건축사사무소 유니트유에이의 최정우 대표는 “도시는 보통 큰 도로에서 점점 작은 폭의 도로들로 흐르게 된다. 스페이스살림도 전면부가 도시와 가깝고 그 뒤는 마을과 가깝다 보니 전면과 후면을 잇는 통로들을 여럿 뒀다"”며 “건물 안에서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사람과 지상층을 지나는 보행자들이 서로 만나고 교차하도록 설계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건물을 살펴보면 지상 1층에만 출입구가 네 곳에 달한다. 거의 모든 방향에서 건물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경사지에 자리잡은 만큼 건물 2층에도 주변 가로와 연결된 출입구가 있다. 지하는 대방역과 바로 연결돼 6차선 대로를 건너지 않고도 건물 내부로 들어올 수 있다.

◇마당 품은 한옥처럼…과감하게 덜어내 ‘햇볕’ 나눴다= 스페이스살림은 ‘비움’과 ‘채움’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이다. 지상과 지하를 막론하고 건물 곳곳에 마당과 같은 빈 터가 있다. 용적률을 꽉 채워 최대한의 실내 공간을 확보하는 현대의 건물과는 대조적이다. 오히려 널찍한 마당을 품은 전통 한옥의 문법에 더 가까운 건물이다. 이 같은 ‘비워진’ 형태는 ‘실내 공간이 있으면 그만큼의 실외 공간 또한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실내 공간이 커질수록 건물이 두꺼워질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모든 공간에 채광과 환기 등의 문제에서 ‘불평등’이 생긴다는 이유에서다. 공간을 빽빽하게 채워 넣는 대신 덜어냄으로써 최대한 많은 실내 공간이 외기와 면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인지 스페이스살림은 지하 공간도 지상만큼 밝다. 선큰(sunken·지하에 자연광을 유도하기 위해 대지를 파내고 조성한 곳) 구조를 활용해 지하에 햇빛이 직접적으로 떨어지게끔 했는데 이 또한 지상 공간을 최대한 비워냈기 때문에 가능했다. 최 대표는 “두꺼운 건물이 도덕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건물이 두꺼우면 외부와 면한 공간만 볕이 잘 들고 통풍도 잘된다. 반면 그렇지 않은 공간은 어둡고 답답해진다”며 “최대한 많은 공간을 외부 공간에 면하게 하기 위해서는 지상을 많이 비워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터들은 건물 이용자들이 교류하는 장(場)이 되기도 한다. 스페이스살림에는 다양한 상점들이 입점했는데 곳곳에 마련된 마당은 야외 장터나 소규모 전시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사회적 약자 위한 배려로 더불어 사는 삶 구현=스페이스살림은 시민들이 만들어가는 현재 진행형의 공간이라는 것이 최 대표의 설명이다. 다양한 스타트업과 상점들의 둥지가 되는 건물인 만큼 이용자의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변화할 수 있는 구조를 갖췄다. 최 대표는 이를 ‘4×4 모듈의 끊임없는 변주’라고 표현했다. 폭이 4m인 모듈을 기본으로 향후 필요에 따라 다양한 크기로 확장하거나 나눌 수 있다. 실제로 스페이스살림의 내부는 폭 4m, 8m, 16m, 24m 등 ‘4m’가 변주된 크기의 공간들로 구성됐는데 이 크기에도 의미가 있다. 소규모 상점과 스타트업이 더불어 사는 공간이어야 하기 때문에 입주자들이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교류할 수 있게끔 공간의 크기를 정했다는 것이다. 최 대표는 “흔히 ‘사회적 거리’의 기준을 4m로 잡는다. 앞에 있는 사람의 표정을 읽을 수 있는 거리가 4m라고 한다. 또 누가 누구인지 식별할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가 24m”라며 “그래서 스페이스살림의 가장 작은 크기의 방의 폭이 4m, 가장 큰 크기가 24m”라고 설명했다.

‘더불어 사는 삶’을 표방한 만큼 설계에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도 반영됐다. 완만한 경사 램프가 대표적이다. 스페이스살림은 경사지에 위치했다. 경사가 심한 곳의 경우 같은 층이라도 한 개 층 정도의 높이 차가 있는데 기울기 24분의 1의 램프를 통해 이 단차를 극복했다. 24분의 1은 평지와 동일한 수준으로 인정될 만큼 완만한 경사다. 또 엘리베이터 등이 위치한 건물의 코어를 여러 곳에 분산시켜 건물의 어느 공간이든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했다. 모든 층에 장애인 화장실을 배치했고 여성·남성의 구별이 없는 ‘젠더리스’ 화장실, 그리고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는 아동 동반 공유 사무실, 영유아 돌봄 교실 등도 설치됐다. 이 같은 배려를 인정받아 스페이스살림은 성별, 나이, 장애 유무나 국적에 따라 차별받지 않고 누구나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건물에 수상하는 ‘제1회 서울 유니버설디자인 대상’을 올해 받았다.
양지윤 기자
ya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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