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이 출근하는 모습을 보면 부러움과 동시에 ‘나는 언제 다시 출근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괴로웠지요. 하지만 열심히 준비하니 그 날이 오긴 오더라고요.”
김현철(57) 씨는 지난 4월 15일을 잊을 수 없다. 그날은 김 씨가 그동안 맡아왔던 일을 뒤로 하고 ‘룸 인스펙터(객실 점검원)’라는 직업으로 새출발한 날이기 때문이다.
김 씨의 첫 직장은 인쇄소였다. 그는 지난 1992년 지인의 소개로 인쇄소에 취업했다. 인사와 회계, 재고 관리 등을 담당하며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하는 직원으로 인정받았던 그는 20년 동안 그 길을 걸어왔다.
그랬던 김 씨는 45세에 다른 길을 택하기로 했다. 1990년대 초만 해도 인쇄업은 호황이었다. 그러나 디지털 전환 등의 영향으로 인쇄업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다른 인쇄소들의 폐업 소식이 연이어 들려오자 그는 새로운 직무로 미래를 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인쇄소에 근무할 당시 그는 ‘엑셀만으로는 사무 업무에 한계가 있다’는 생각에 수년에 걸쳐 프로그래밍을 공부하고, 전산 관리 업무까지 맡은 경험이 있었다. 이랬던 경험을 살려 6개월 동안 국비 과정으로 코딩을 추가로 배운 뒤, 2015년에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코딩을 가르치는 강사가 됐다. 이후 프로그래밍을 더 배워 웹 페이지 개발자로 전직했으나 1~2년으로 한정된 웹 개발 프로젝트 특성상 항상 고용 불안을 겪어야만 했다. 결국 마지막 프로젝트를 끝으로 지난 1월 ‘백수’가 됐다.
“고난도의 기술이 있지도 않고, 힘이 좋아 막노동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력서를 매일 20통씩 넣었는데 한 군데서도 연락이 안 오더군요.”
지난 3월 재취업이 안 돼 고전하던 그에게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발신자는 서울시 중구청, ‘호텔리어 양성과정 교육생을 모집한다’는 안내 문자였다. 김 씨가 알아보니 호텔은 코로나19 유행이 끝나면서 새롭게 많은 사람을 뽑는 업종이었다. 청년층 구직자가 적다 보니 중장년을 활발하게 채용한다는 소식도 들렸다. 이러한 호텔에서 경력을 쌓으면 70세에도 일할 수 있을 거란 생각과 양성과정을 중구청과 서울중장년내일센터가 진행한다는 점이 믿을 만 했던 그는 곧바로 과정에 등록했다.
“홀로 잘 해내던 인생 전반전과는 달리 후반전에는 나를 도와 줄 지원군이 필요해요. 양성과정 중 맥가이버같이 모든 걸 뚝딱 고치는 강사님의 모습에 반해 설비 직무에 꽂히게 됐지요.”
그는 양성과정을 수료한 뒤 연계된 호텔에 면접을 거쳐 마침내 지난 4월 15일 재취업에 성공했다. 지금 그의 직업은 룸 인스펙터이자 시설관리 보조다.
사무직에서 현장직으로…"건강해지고 오히려 좋아"
룸 스펙터라는 직무는 일반인에게 다소 낯설다. 호텔에서는 일반적으로 퇴실 객실의 침구나 각종 소모품 등을 하우스 맨이 수거하면, 메이드가 객실을 채워 넣고, 정돈한다. 이후 정비가 끝난 객실이 손님을 맞을 준비가 되었는지를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사람이 바로 룸 스펙터다.
김 씨가 점검하는 방은 하루에 40개 안팎. 오전 8시에 출근해 9시부터 점검을 시작, 고객이 입실을 시작하는 오후 3시에는 점검을 마쳐야 한다. 객실 내 구비된 컵만 해도 로고 방향이 알맞게 놓여 있는지, 뚜껑에 묻은 것은 없는지, 컵에 물 자국은 없는지 등을 따져 봐야 한다. 객실 전체를 꼼꼼히 확인한다면 점검할 것만 100가지가 넘는단다. 고장이 난 수전과 수명이 다한 조명 등 시설을 정비하는데도 시간이 드니 하루가 빠듯하게 돌아간다.
그의 하루 평균 걸음 수는 1만 2000~1만 3000보. 한동안 80kg에 머물렀던 체중이 룸 인스펙터 업무를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72kg로 쑥 내려갔다.
그는 “그래도 이 일이 좋다”며 “지금도 예전과 같은 사무직을 했으면 오히려 더 힘들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회사에서 일할 때는 쉼표 하나, 숫자 ‘0’ 하나 때문에 골치 아팠던 적이 많았어요. 쉼표 하나 때문에 회사 프로그램이 이틀 동안 멈췄던 때도 있었죠. 10만 원짜리 결제 건이 100만 원이 되면 안 되잖아요. 버그(오류) 찾는 일은 또 얼마나 큰 스트레스인데요. 지금 하는 일은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없고, 많이 움직여 건강해졌어요.”
김 씨에게 시설관리는 새로운 직무지만 예전 업무 경험을 살려 빠르게 적응했다.
“신입일 때는 정말 일일이 확인할 게 많더군요. 체크리스트 종이를 받았는데 찢어지고, 잃어버리게 됐죠. 휴대전화만 있으면 보고 처리할 수 있게 구글 사이트(구글에서 제공하는 무료 웹 사이트 제작 서비스)로 간단하게 웹 페이지를 만들었어요.”
경영사무를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프로그래밍을 배웠던 것과 트렌드가 빠른 IT 업계에 몸담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을 배워왔던 게 도움이 된 셈. 하지만 실력과 열정이 있어도 나이 때문에 일자리에서 거절당한 경험이 여러 차례다. 이런 경험을 통해 그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일까. 김 씨는 재취업을 목표로 하는 중장년에게 때때로 현 상황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해주고 싶단다.
“스스로 젊다고 착각할 때가 있어요. 호텔에서 인력소 통해 사람을 불렀는데 50대가 온 적이 있었거든요. 저도 모르게 ‘같이 일하기에 나이가 너무 많지 않나’ 하다가 ‘나도 저 나이대지’ 깨닫고 화들짝 놀란 적이 있지요. 현재 상황을 잘 파악해야 해요. 월 400만~500만 원 벌다가 200만 원대로 떨어지면 ‘(내 경력에) 이 일을 해야 하나’ 싶은 사람도 있대요. 주어진 나이에 주어지는 일을 열심히 하자고 받아들이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김 씨는 70대가 넘어서도 출근하는 것이 목표다. 두꺼비 집 한 번 열어본 적 없던 김 씨가 싱크대 수전도 뚝딱 고치자 아빠를 바라보는 두 아들의 눈빛도 바뀌었다.
“앞으로 시설 점검과 수리, 영어 실력도 키워 자신감 있게 제2의 인생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 정예지 기자
- yeji@rni.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