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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후 어머니 돌보다 도서관까지 세웠어요”···시니어도서관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 김상미 가원시니어도서관 이사장

식품업체 임원서 돌봄센터, 도서관 운영까지

문화적 돌봄 필요한 어르신 위한 공간 조성

“어르신 편하게 쉬고 교류하는 곳 만들고파”


수도권 지하철 3호선 대화역 인근의 한 상가건물 8층에는 다소 특별한 공간이 있다. 음식점이거나 사무실이 대다수인 주변과 달리 이곳에는 도서관이 있다. 3월의 어느 평일 오전,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가 잠시 앉아 있는데 어르신 한 분이 들어왔다. 그는 기자에게 “옆에 앉아 과제를 좀 해도 되겠느냐”고 묻더니 자리에 앉아 필사를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시 필사 모임에 참석하고 있단다. 그 와중에 다른 어르신 3분이 도착했다. 이들은 잠시 가벼운 얘기를 나누더니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부하고, 사람을 만나고, 책을 읽는 공간. 언뜻 보기에는 여느 도서관과 다를 바 없지만 잠시 머물러 보니 차이점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우선, 이곳의 주된 방문자는 어르신이라는 점. 그리고 볼펜 ‘딸깍’ 소리도 신경 쓰이는 다른 도서관과 달리 자유롭게 대화를 나눠도 눈치를 주는 사람이 없다는 점. 그렇다. 이곳은 온전히 어르신들을 위해 만들어진 국내 최초의 시니어 도서관인 가원시니어도서관이다.

어린이 전용 도서관은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시니어를 위한 도서관은 거의 찾기 힘들다. 게다가 이곳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기관 등이 만든 곳이 아닌 개인이 운영하는 민간 도서관이란다. 설립 이유, 운영 상황 등 궁금한 게 많은 기자는 이곳을 설립한 김상미(50) 이사장을 만나 얘기를 들어봤다.

라이프점프와 인터뷰하고 있는 김상미 가원시니어도서관 이사장. 정예지 기자


김 이사장은 식품업체에서 17년간 일했다고 한다. 젊은 나이에 기업의 연구소장과 이사도 맡을 만큼 실력도 인정받은 그였지만 2016년 회사를 관뒀다. 몸 안에 두 곳에서 암이 발견된 것. 퇴직했지만 마냥 쉴 수만은 없던 그는 방문요양 관련 일을 시작했다. 재직 때 먼저 퇴직한 선배들을 보며 사회복지사, 청소년지도사 등 습관처럼 여러 자격증을 땄는데 이게 나름 도움이 된 셈이다.

2020년에는 주간보호센터를 열었다. 김 이사장이 13세일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줄곧 홀로 딸을 키웠던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지시자 직접 모실 요량으로 결정한 일이었다. 이후 건강을 되찾으시며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신 어머니와는 자주 전화로 안부를 확인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 이사장이 어머니께 전화를 드려 “무얼 하고 계시느냐”고 묻자 “장 보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른 아침부터 시장에는 왜 가셨느냐”고 되묻자 뜻밖의 답을 들었다. 시장에 갔다는 게 아니라 할 일이 없어 천장을 보고 누워있다는 얘기였다. 김 이사장은 충격을 받았다. 마침 주간보호센터에 계신 어르신들을 위해 문화적인 돌봄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결국 그는 2021년 9월 시니어도서관을 열었다. 어르신들에게 ‘즐길 거리’를 제공하겠다는 생각에서다.

시니어 그림책을 추천하고 있는 김상미 가원시니어도서관 이사장. 정예지 기자


주위에선 “미쳤느냐”는 반응이 잇따랐다. 그래도 김 이사장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믿고 사업을 끌고 나갔다. 우리나라에 어르신을 위한 물리적 돌봄 체계는 많이 자리 잡은 편이다. 하지만 문화적 돌봄은 걸음마 수준. 우리나라는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DC) 국가 중 노인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도시와 그 외 지역의 문화적 인프라 격차도 심한 편이다. 시니어도서관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작은 시도인 셈이다.

“사람들은 제가 남을 위해 이런 일을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사실 이건 나를 위해 하는 일이에요. 누가 시켜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요. 무엇보다 즐겁고, 내가 좋아하기에 가능하지요.”

가원시니어도서관은 단순히 어르신들이 책을 읽는 공간을 제공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는다. 어르신들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전달하는 일에도 힘 쏟는다. 가령 최근 늘어난 영어 간판을 읽기 쉽도록 알려드린다든지, 디지털 기기 이용법을 설명한다든지 하는 식이다. 매년 키워드를 정해 운영하기도 한다. 지난해는 ‘외래어’를 키워드로 삼고 팝송 따라 부르기 등의 프로그램을 열었다. 올해 키워드는 ‘재탄생’이다. 다양한 재능을 보유한 어르신들이 직접 강사가 돼 또래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가원시니어도서관에서 모임을 가지거나 공부하고 있는 시니어들. 정예지 기자


운영 자금은 어떻게 마련할까. “사람들은 제가 상속을 많이 받아 도서관을 운영하는 줄 알아요. 제 어머니는 국가 지원을 받는 줄 아시고요. 둘 다 사실이 아니에요.”

김 이사장은 자비를 들여 도서관을 운영해 왔다. 임대주택에 살고 150만원에 산 중고차를 타고 다니며 최대한 생활비를 줄여 도서관 운영에 보태고 있다. 김 이사장은 “임차료와 관리비가 밀려 도서관에 압류 딱지가 붙은 적도 있다”며 “‘이렇게 힘들 줄 알았다면 시작하지 말 걸’이라는 생각도 했다”고 말했다.

쌓여가는 적자에 김 이사장은 결국 2023년 폐관을 결정했다. 그런데 계속 문을 열어 달라는 이용자들의 요구가 빗발쳤다. 지역사회에 폐관 소식이 알려지면서 1만원에서 100만원까지 후원금을 보내주는 분들도 늘었다. 지금도 여전히 아슬아슬한 상황이지만 도서관 이용료와 참가비를 받으면서 버티고 있다.

운영을 계속 이어가는 힘은 꾸준히 이곳을 찾아주는 어르신들에게 있다. “글을 전혀 못 쓰는 분이 계셨어요. 베껴 쓰는 일부터 시작해 6개월 만에 10페이지 분량의 책자를 완성하시더라고요. 어느 날은 ‘인생 처음으로 책 한 권을 끝까지 다 읽었다’며 신나서 달려오시기도 했고요. 이런 분들처럼 우리 도서관 덕분에 인생이 바뀌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다시 힘을 얻습니다.”김 이사장의 꿈은 ‘월세’ 없는 곳에서 도서관을 운영하는 것이다. “시니어상담소가 늘고 있지만 정작 어르신들은 잘 가지 않아요. 마음을 열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우리 도서관은 이런 어르신들이 편하게 찾아와 넋두리를 하면서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공간이 되고 싶어요. 무엇보다 어르신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장소가 되고 싶습니다.”
정예지 기자
yeji@rni.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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