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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경제 공동체 '청년아로파'를 만들다" 박준현 대표

[원부연의 직업의 탄생 ⑩] "회사 이후의 삶, 저희만의 공동체로 실천해가고 있습니다."


창업을 넘어 ‘창직 하는 사람(Job Creator)’들이 늘고 있다. 끊임없는 세상의 변화와 새로운 것들이 넘쳐나는 시대, 회사에서 찾지 못한 직업 정체성에 대한 숙제를 개인들이 스스로 고민해 찾게 된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의 직업을 새롭게 정의내리기 시작했다.

‘원부연의 직업의 탄생’은 스스로 창직을 한, 나만의 단어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이야기다. 개인과 산업 두 영역에서 새로운 화두를 제시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두 번째 커리어를 꿈꾸는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인사이트를 전하고자 한다.

2019년 가을, 애월읍에 오픈한 게스트 하우스 ‘아무렴, 제주’


남태평양 아누타 섬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던 한 부족은 나눔과 협동을 상생의 방식으로 선택했고 ‘아로파’라는 이름을 명명했다. 그 이름은 오랜 시간이 흘러 한국의 한 청년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자본주의를 대체할 그들만의 경제 공동체를 꿈꾸며 ‘청년아로파’를 만들었다.

이들은 월급의 십분의 일을 회비로 낸다. 대신 수익은 동일하게 n분의 일로 가져간다. 을지로 와인바 ‘십분의 일’ 공간을 통해 수익을 내기 시작한 그들은 ‘빈집’, ‘밑술’이라는 브랜드 만들며 점점 사업체를 확장해 나갔다. 8명의 공동체원은 대체로 회사를 다니는 30대 직장인이다.

회사 후 두 번째 인생을 꿈꾸는 멤버를 위해 ‘청년아로파’는 공동체 자금으로 새로운 기회를 지원한다. 그렇게 대기업을 다니던 멤버 한 명이 작년 퇴사를 감행했고, ‘아무렴, 제주’라는 게스트 하우스의 대표가 되었다. ‘청년아로파’ 멤버이자 ‘아무렴, 제주’ 의 박준현 대표를 만났다.




취준생, ‘청년아로파’에 동참하다


- 어렸을 때 꿈은 무엇이었나?

“꿈이라고 할 만큼 원하던 직업은 없었다. 취직 잘 되는 경영학과를 전공했고 완벽한 제너럴리스트를 추구했다. 학점 관리나 공모전에 몰두했고. 졸업 이후 뭘 하겠다는 생각도 딱히 없었다.”

- 프랑스로 교환 학생을 다녀온 후 변화가 생겼다고?

“우연치 않게 교환학생을 준비했고, 프랑스로 가게 됐다. 당시 함께 지내던 외국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문화 충격을 받았다. 틀에만 맞춰 살던 내가 다양하게 사는 삶을 보게 된 것이다. 여유와 경험의 필요성을 느끼며, 졸업 후 바로 취직해야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 그러다 바로 대기업에 입사했다.

“좀 더 새로운 경험을 하고자 했지만 아버지가 염려를 하셨다. 일단 취직을 하기로 했고, 닥치는 대로 입사 원서를 썼다. 그 중 LF에 입사하게 됐다. 2012년 11월 때의 일이다.”

- 회사 생활은 어땠나?

“닥스라는 브랜드의 영업 부서에 있었다. 패션 회사다보니 개방적인 분위기에 개성파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다소 보수적인 사람인지라 자처해서 야근도 많이 하고 남들 피하는 회식 참여도 적극적이었다. 선배들과도 잘 지냈고 일도 나름 재밌었다. 그런데 3~4년차가 되다보니 생각이 많아지면서 매너리즘에 빠지기 시작했다. 고민 끝에 부서를 옮기기로 했다.”

- 부서를 옮기며 문제가 해소 되었는지?

“3년간 영업 부서에 있다가 같은 브랜드의 상품 기획팀으로 옮겼다. 안타깝게도 신선한 자극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연차가 쌓이면서 머리만 굵어졌다. 효율을 따지는 내 모습에 회의감이 들었고. 5년 차 즈음 이 곳이 나의 평생직장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어떤 옵션을 고려했나?

“이직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해보고 싶은 브랜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지금 회사 사람들이나 일하는 방식에도 만족했고. 회사가 아닌 다른 대안으로 고민을 시작했다.”

- 다음을 정하지 못한 채 일단 퇴사했다.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만 가진 채 계속 퇴사를 미뤘다. 그러다 인사면담을 하는데 팀에서 조금 더 큰 역할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러다 갑작스레 퇴사를 하게 되면 함께 일하던 동료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제서야 퇴사하겠다고 말씀 드렸다.”

- 퇴사에 대한 반대는 없었나?

“‘청년아로파’나 공동체에서 운영하는 와인바 ‘십분의 일’의 존재를 부모님이 모르셨다. 퇴사 결심 후 처음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앞으로도 내가 하고 싶은걸 마음껏 해보겠다고. 걱정을 한참 하셨는데 마침 ‘십분의 일’이 KBS ‘다큐 3일’에 나왔다. 방송에 나올 정도니 장난으로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셨던 거 같다. 어렵게 풀 일이 비교적 쉽게 해결됐다.”

- 퇴사 이후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일단 3~4개월 푹 쉬며 2019년을 맞이했다. 당시 공동체인 ‘청년아로파’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해보자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제주 살이 욕심이 있던 터라 제주도에서 뭔가를 해보면 좋겠다는 제안을 꺼냈다.”

경제 공동체 ‘청년아로파’ 멤버이자 ‘아무렴, 제주’의 박준현 대표




자본주의를 대체할 경제 공동체


- ‘청년아로파’를 하게 된 계기는?

“프랑스에서 만난 친구들 중 ‘청년아로파’ 초창기 멤버가 있었다. 당시 몇몇이 작은 술집을 해보면 어떨까 하던 차였다. 그 때 ‘청년아로파’라는 공동체로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처음에는 술집을 함께 운영하는 형태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조금은 다른 콘셉트더라.”

- 어떤 콘셉트였나?

“투자금이나 회비 규모는 각자 다르지만 수익 배분은 동일하게 하는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 각자가 낼 수 있는 만큼의 투자금과 월급의 일부분을 내서 그 돈으로 장사를 해보자는 취지였다.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지향점이 굉장히 순수하다고 느껴졌다.”

- 자유로운 투자금과 회비라는 게 가능한가?

“참 이상한데 거절하기에는 뭔가 매력적이었다. 혼자라면 할 수 없을 일을 같이 한다는 것도 좋았고. 수익에 대한 방향성만 독특했을 뿐 그 취지는 좋다고 생각했다. 사실 ‘청년아로파’ 초창기 멤버 중에는 나처럼 대기업에서 월급 받는 사람도 드물었다. 그 말인 즉 나는 회비를 많이 내야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뭔가 소소한 행복을 주는 느낌이었다.”

- 어떤 지점에서 소소한 행복을 느꼈을까?

“회사에 다니다보면 어느 회사 다니고, 월급은 얼마 받으며, 재테크를 어떻게 하는지 등, 현실적인 이야기들만 하지 않나. 그런데 이 공동체를 보며 예전에 프랑스에서 느꼈던 삶에 대한 여러 방식들이 다시 떠올랐다. 혹여나 여기서 실패하더라도 또 다른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 ‘십분의 일’, 공동체 사업의 시작이었다.

“어떻게 하면 공동체로서 우리가 함께 잘 살 수 있을까 고민이 ‘청년아로파’의 시작이었다. 돈 보다 사람을 중시하는, 그러면서도 서로가 함께 먹고 살 수 있는 공동체를 고민했다. 그러려면 일단 돈이 필요했고 공동체의 의미가 담긴 공간을 만들어야 했다. 첫 프로젝트로 을지로에 와인바 ‘십분의 일’을 오픈했다.”

- ‘십분의 일’공간 운영, 누가 책임자였나?

“당시 CJ ENM에서 드라마피디를 하다 퇴사한 이현우가 맡았다. 대신 각자가 월급의 10프로라는 회비를 내 가게 운영이 원활하지 않아도 운영자의 월급은 공동체에서 책임지기로 했다.”

- ‘청년아로파’ 멤버는 몇 명인가?

“7명이기도 했다가 10명 까지도 갔다, 지금은 8명이다. 월급의 10프로를 회비로 낸다는 방식이 ‘십분의 일’이라는 공간 이름에도 반영됐다.”

- 신규 멤버를 추가할 계획은 없는지?

“신규 멤버는 모든 사람이 만장일치 할 때만 받을 수 있다. 신규 멤버가 불편해 기존 멤버들이 나가는 건 안 되는 일이니까. 초반에는 신규 멤버 추천 자리가 종종 있었지만 최근에는 신규 멤버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공동체 확장에 대한 논의를 많이 하는 편이다.”

- 박준현 대표가 생각하는 ‘청년아로파’의 지향점은?

“초기에는 단순 동업관계라고 생각했다. 직장인이다 보니 나만의 공간에 대한 로망도 있었고. 함께 하면 부담이 덜하겠다는 생각이 컸다. 그런데 하다 보니 공동체 사람들이 점점 가족처럼 되어 가더라. 지금은 ‘청년아로파’ 멤버들이 다 같이 안정적으로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공동체의 가치가 내 가치관까지 변화시켰다.”

- 어떤 가치관의 변화였나?

“스스로 물욕이 많이 없어졌다. 예전에는 연봉 등 다른 사람과의 비교가 급급했다면, 지금은 내가 아닌 우리라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그러다보니 당장의 숫자는 큰 가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다 같이 안정적인 삶을 영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청년아로파’의 첫 프로젝트로 진행한 을지로 와인바 ‘십분의 일’ 출입구. 간판이 없는 게 인상적이다. /출처=더 트래블러 매거진

‘청년아로파’의 첫 프로젝트로 진행한 을지로 와인바 ‘십분의 일’ 내부 전경 /출처=더 트래블러 매거진




타인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것


- ‘청년아로파’, 자본주의의 어떤 점을 대체하고 싶었나?

“자본주의에서는 개인의 실패로 모든 게 끝나는 경우가 많다. 자본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기회가 가는 게 현실이고. 자본주의에서 박탈된 기회를 대체할만한 걸 만들고 싶었다. 어떤 사람들은 공산주의라 표현하기도 하더라. (웃음)”

-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 공동체란 쉽지 않은 방식이다.

“맞다. 매일이 가장 빡센 조모임을 하는 기분이다. 평생을 당연하게 여겨왔던 나의 가치가 매번 무너지는 경험의 연속이었다. 돈과 효율성을 우선으로 하는 의사결정을 포기해야 하며, 누군가 다른 가치를 추구한다면 기존의 의사결정은 언제든 번복될 수 있다. 효율을 포기하는 게 힘들 때가 많지만 이제는 비효율의 반복에 꽤 익숙해졌다.”

- 비효율의 반복이라니, 힘들지 않나?

“다행히 시간이 지나 사소한 것들은 전례가 생기고 설득의 과정이 간소화 됐다. 오랜 기간 소통 하다 보니 노하우도 생겼고. 일정 부분은 권한을 주며 나름의 효율성을 챙기게 되었다. 초반에는 1부터 10까지 전부 설득해야 했다면 이제는 어느 정도 학습 효과를 발휘할 수 있게 됐다.”

- 학습의 노하우를 기록으로 남겼다고?

“우리가 치열하게 협의해온 과정을 기록으로 만들어 우리만의 정관으로 완성했다.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 월급의 ‘십분의 일’을 내기로 한 기준은?

“‘청년아로파’를 업으로 하는 멤버들의 생계를 책임져 주기 위해 책정한 비용이 시작이었다. 적어도 우리가 모은 회비로 누군가의 월급은 줘야 한다는 취지였고. 논의 끝에 월급의 10프로 정도가 적당하겠다 싶었다.”

- 결국 누군가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이다.

“누구나 해보고 싶은 일이 저마다 있을 것이다. 당연히 혼자서 하기에는 부담스러울 테고. 그걸 공동체에서 지원하면서 최소한의 경제적 수준을 보장해주고 싶었다. 그 대상이 내가 될 수도 있었기에 조직에 대한 진지함도 그만큼 깊어졌다.”

- 월급의 10프로, 양심껏 냈나?

“서로의 신뢰를 기반으로 하지만, 연1회 적절한 수준의 증빙자료를 받고 정리한다.”

- 백수도 최소 회비를 낸다고?

“처음에는 5만원이었다가 이후 10만원으로 올렸다. 공동체가 나의 가족처럼 의지할 정도라면 낼 수 있는 금액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 금액을 정하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7만원이냐 10만원이냐 이런 것들 정하는 게 늘 어렵다.”


자본주의를 대체할 경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8명의 멤버들, '청년 아로파'




쉽지만은 않았던 공간 창업


- ‘십분의 일’이 첫 공간 타이틀이 됐다.

“공간 이름 역시 모든 멤버들과 함께 정한다. 역시 그 과정도 만만치 않다. ‘십분의 일’도 사실 와인바에 적합한 이름은 아니었다. 그런데 잘 되고 나니 가게 이름이 상징적이 되었고, 브랜드 스토리에 큰 도움이 됐다.”

- ‘십분의 일’ 공간 계약이 쉽지 않다 들었다.

“첫 공간 ‘십분의 일’을 계약하기까지 1년 정도 시간이 걸렸다. 대학로 등 공간을 계약 할 때마다 이상하게 어긋났다. 생각한대로 실행이 안 되니 조급한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와 보니 을지로를 선택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 처음 해보는 공간 창업이라 어려움이 많았다고?

“‘십분의 일’ 운영을 맡은 이현우 대표가 고생이 많았다. 다들 알바 경험이 전부였던지라 초반에는 어설픈 사공들만 있었고. 결국 이현우 대표 스타일에 맞춰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1년간 조금씩 바꿔가며 운영하다보니 지금의 형태로 완성될 수 있었다.”

- 사공이 많으면 대표 운영자가 힘들지 않나?

“솔직히 그게 가장 어렵다. 최대 비효율인 지점이기도 하고. 공간의 운영자가 제일 잘 아는 사람인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다는 게 스트레스일 때가 많다. ‘십분의 일’의 경우 첫 케이스라 더 힘들었을 테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한다.”

- ‘십분의 일’ 가게 입구가 독특하다.

“가게에 간판이 없다. 처음에는 간판 살 돈이 없어서 아끼자는 것도 있었고. 어차피 구석구석 찾아와야 하는 자리니 간판이 꼭 필요할지도 의문이었다. 이것저것 테이프로 뜯어 글자를 붙이다 보니 지금과 같은 입구 형태가 완성되었다.”

- ‘아무렴, 제주’ 아이디어의 시작은?

“‘십분의 일’, ‘빈집’ 외에도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욕심이 공동체에 있던 상황이었다. 그 때 내가 제주도에서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의견을 처음으로 냈다. 개인으로 준비하는 것 보다 공동체로 함께 하는 거에 의미를 두던 차였다.”

- 술집을 하다 갑자기 게스트 하우스를 하게 된 이유는?

“‘십분의 일’도 그렇지만 ‘아무렴, 제주’도 내가 하고 싶은 브랜드를 반영하고 싶었다. 제주도에 관심이 있었고 운영자인 내가 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정해야 했다. 물론 완성되어가는 과정에서 멤버들 각자의 그림들도 조금씩 더해졌다.”

- ‘청년아로파’ 결성 후 첫 정식 퇴사자다.

“나의 행보가 다른 멤버들에게도 자극이 됐으면 한다. 누구보다 속세의 것을 원했던 구성원이 퇴사를 한 것도 의외였을 거고. 나름 많은 것들을 내려두고 시작했다. 이후 두 명의 퇴사자가 더 생겼다.”

그 누구보다 효율적인 삶을 지향했지만 공동체를 만난 후 박씨의 삶은 달라졌다.




신규 프로젝트, ‘아무렴, 제주’


- ‘아무렴, 제주’, ‘청년아로파’의 지원으로 시작했다.

“공동체에서 하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다면 기획안을 제안한다. 몇 달간의 회의를 통해 아이템 결정이 되면 좀 더 구체적인 비용 계획과 일정을 짠다. 나 역시 처음에는 제주도만 생각한 게 전부였다. 막상 제주도에 와보니 술집은 차량 문제 등으로 힘들 것 같았고. 결국 게스트 하우스로 풀리게 됐다.”

- 게스트 하우스를 선택한 이유는?

“초기에는 기존 운영하던 콘셉트의 와인바도 논의가 됐지만, 제주에서의 와인바 사업은 여행 소비자 입장에서 제약이 많겠더라. 평소 내가 제주에서 제일 자주 소비하던 아이템이 게스트하우스였다. 요리 등 크게 전문성이 없어도 가능했고. 또래 타깃들을 위한 공간을 잘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 오픈까지의 실행 과정은?

“게스트 하우스 아이템을 정한 후, 약 3달 동안 제주도의 부동산 매물들을 보러 다녔다. 공동체 프로젝트였기에 멤버들과도 함께 리서치 했다. 결국 지금의 공간을 선택했다.”

- 비용은 어느 정도 들었나?

“제주도라 일 년치 월세를 연세로 계약한 후 부분 리모델링을 진행 했다. 모든 비용을 ‘청년아로파’에서 지원 받았다. 금액을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가게 하나 오픈하는 비용만큼은 들었다. 가오픈 기간을 2달 정도 거친 후 2019년 9월에 정식 오픈했다.”

- 공동체에서 월급을 받는다고 들었다.

“그렇다. ‘십분의 일’과 동일한 방식이다. 일하는 시간만큼 월급을 받고, 수익이 나면 일부는 법인으로 귀속 후 남은 수익을 모두가 n분의 일로 가져간다. 지금도 각자 월급의 10프로를 회비로 내며 공간에서 마이너스가 나도 월급을 보전한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부담이 덜하다.”

- 손님 응대, 어렵지는 않나?

“사람을 대하는 게 어렵지는 않다. 그런데 호스트다 보니까 대화의 패턴이 비슷해져 형식적인 참여 빈도가 높아지더라. 그런 지점들을 조심하려고 하는 편이다.”

- ‘아무렴, 제주’의 매출은 어떤가?

“제주 내 타 게스트 하우스와 콘셉트가 다른 만큼 비용도 다소 비싼 편이다. 다만 한두명이 조용히 즐길, 호텔과 일반 게스트 하우스 사이 대안을 고민하던 분들을 위한 공간인 만큼 그 취지에 맞는 손님들이 와주신다. 덕분에 오픈 후 금방 자리를 잡았다.”

- 또 다른 형태의 공유경제다.

“우선 공동체로 하다 보니 심리적 안정감이 크다. 그렇기에 또 다른 시도도 해볼 수 있고. 게스트 하우스를 다른 콘셉트로 할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다. 단순히 매출을 위해 손님을 받는 게 아닌 경험을 위한 공간을 지향할 수 있다. 그 부분이 고객에게도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 올해 ‘아무렴, 제주’ 박준현 대표의 목표는?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해보고 싶은 것들이 굉장히 많았다. 취향을 기반으로 한 모임도 기획해보려던 차였고. 아무래도 이 상황이 지나야 실행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렴, 제주’ 내부 모습. 소수가 조용히 즐길 공간을 지향한다.

‘아무렴, 제주’ 내부 모습. 소수가 조용히 즐길 공간을 지향한다.




창업가, 박준현의 비전과 미래


- 향후 ‘청년아로파’에서 본인이 맡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

“‘아무렴, 제주’를 통해 나 스스로 공동체에서 새로운 케이스가 됐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다른 공동체 멤버들도 더 깊숙하게 관여했으면 한다. 하나의 부족 사회처럼 실질적인 공동체를 이뤘으면 하는 바람이다.”

- 궁극적인 꿈은 무엇인지?

“결국 나는 브랜딩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지금까지 공간들도 의미가 있었지만 롱런해도 괜찮을 브랜드를 장기적으로 만들고 싶다.”

- ‘아무렴, 제주’ 이후 박준현 대표의 행보는?

“게스트 하우스를 확장하지는 않을 것 같다. 대신 이 공간에서 파생될 다른 형태의 공간 사업은 구상해보려 한다. 그게 무엇이 될지는 앞으로 고민해봐야 하겠지만. 어쨌든 제주에서 5년간은 무언가를 계속 시도할 예정이다.”

- 제주에서의 일상은 어떻게 보내는지?

“애초에 제주도를 자주 다니기도 했고 나보다 먼저 제주살이를 시작한 지인들이 많다. 그래서 서울 살 때와 일상이 다르진 않다. 서핑, 러닝, 축구 등 취미생활이 많아 시간도 나름 잘 쓰는 편이다.”

- 타지 사람이라 힘든 점은 없나?

“다행히 ‘아무렴, 제주’가 있는 이 지역은 외지인들이 많아 서로가 붙임성 있게 지내는 편이다. 안타깝게도 인근 지역들을 보면 갈등이 많긴 하더라.”

- ‘청년아로파’를 한 문장으로 정의한다면?

“참 어렵다. 돈, 의미, 브랜드 등 여러 관점이 있을 것이다. 이를 바라보는 멤버들의 시선도 제각각이고. 결국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평등한 경제 수준을 유지하는 게 공동체의 가장 큰 골격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함께 적절한 벌이를 할 수 있는 공동체.’ 정도가 현 위치가 아닐까 생각한다.”

- ‘청년아로파’와 같은 경제 공동체, 추천하는 방식인가?

“사실 우리도 과정에 있는 공동체다. 부족한 부분들이 정말 많고. 다만 우리가 해보고 싶은 것들을 해 가며 보다 단단해지고 규모가 커진다면, 지금과는 다른 형태의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지속 가능한 컨텐츠를 쌓는다면, 그 때 가서 노하우를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 제주에서의 창업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만약 내가 좋아하고 자신 있는 아이템이라면 서울 등 도시에서 장사하는 것 보다는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거다. 임대료 부담은 적지만 도시만큼 소비력은 크다보니. 도시에서만큼 성공에 치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애월의 일몰. 도시의 치열함에서 잠시 멀어지는 시간이다.


원부연. 서울경제신문 라이프점프 객원기자. 전 광고 기획자에서 음주문화공간 기획자로 창직 후 술집, 극장, 살롱 등 서로 다른 9개의 공간을 런칭했다. <합니다, 독립술집>, <회사 다닐 때보다 괜찮습니다.>, <퇴사 말고, 사이드잡> 세 권의 책을 쓴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원부연 객원기자
서민우 기자
ingagh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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