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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6억 기부한 이수영 KAIST 발전재단 이사장은 원조 'N잡러'

서울대 법대 출신 여성 기자로 사회 첫 발

'농공병진(農工竝進)'에 공감...목축업 뛰어 들어

모래판매업, 부동산업까지 다모작 인생 '꽃대'

시련 겪어도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

/이호재 기자


‘N잡러’는 요즘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핫(Hot)’한 단어 중 하나다. 2개 이상 복수를 뜻하는 ‘N’과 직업을 의미하는 ‘job’, 사람을 뜻하는 ‘~러(er)’가 합쳐진 신조어로 ‘여러 직업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다. N잡러는 평생 직장의 개념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현대 사회에 새로 등장한 인간 유형이다. ‘회사에 뼈를 묻겠다’는 레토릭 대신 ‘회사가 내 인생을 챙겨주지 않는다’는 냉철한 현실 인식 아래 자기계발과 자아실현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직업을 바꿀 수 있는 융통성을 갖추고 있다. 본업 외에 여러 부업과 취미 활동을 즐기며 시대 변화에 대한 적응력도 높다.

그런데 이런 N잡러의 삶을 무려 50여년 전부터 실행에 옮긴 사람이 있다. 최근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676억원의 부동산을 기부하기로 해 화제를 모은 이수영 KAIST 발전재단 이사장이 그 주인공이다. 이 이사장은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하지 않던 1960년대 초반부터 기자생활을 시작해 펜 하나로 당대를 주름잡았던 재벌 총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기자를 할 때 목장 일에 뛰어들어 목축업으로 성공했고, 사업가로서의 눈썰미를 발휘하며 모래 판매업에도 뛰어 들었다. 이후 부동산업에도 뛰어들어 큰 부를 이뤘다. 대학 동기 동창과 결혼하기 전까지 평생 일과 사랑에 빠진 셈이다. 라이프점프가 원조 ‘N잡러’로서 다모작 삶을 살고 있는 '꽃대('꼰대'의 반대말로 희망을 주는 중장년 세대를 일컫는 말)' 이 이사장을 만났다.

- 경기여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 당시 ‘서울대 법대 나온 여자’는 흔치 않았을 것 같은데. 굳이 기자라는 직업을 택한 이유는 뭐였나.

“내가 4남 4녀 중 막내인데 어려서부터 병약했다. 부모님이 거의 안고만 키울 정도로 귀하게 컸다. 늘 최고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경기여중고를 나와 서울대 법대에 입학할 때까지는 순탄하게 살았다. 하지만 대학 3학년 때 사법고시에 떨어지면서 몸과 마음이 망가졌다. 첫 번째 실패였다. 살기 위해 다시 시작한 게 영어학원 등록이었는데, 우연히 게시판에서 서울신문기자 모집 공고를 보게 됐다. 법대 남학생 동기들도 같이 응시했는데 여자인 나만 붙었다. 1963년의 일이다.”

- 남자 법대 동기들을 제치고 신문사에 입사했는데 4개월 만에 그만뒀다고?

“파벌 다툼이 싫었다. ‘서울대 법대 나온 여자’라는 꼬리표 때문에 견제와 질시의 대상이 되는 것도 참을 수 없었다.

- 기자라는 직업이 싫었던 것은 아니었나.

“그렇다. 이듬해 회사 선배 소개로 기자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4년 정도 일하다 1969년 서울경제신문에 경력직으로 옮겼다.”

- 서울경제신문 기자 시절이 '인생의 황금기'였나.

“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강제폐간 되기 전까지 서울경제는 시장 점유율이 70%를 훨씬 넘었다. 경제 여론을 주도하는 필독 신문이었다. 당시 언론계에 성차별이 심하기는 했지만 창업주인 백상(百想·장기영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애국자이고 인재를 아꼈다. 내가 12년 가까운 서경 기자 시절이 인생의 황금기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값진 시간으로 생각하는 이유다. (백상이 1977년 숨지고) 1980년 노조 설립을 주도했다는 오해로 강제해직되기는 했지만 서경을 친정으로 생각한다. (웃음)”

- 재벌 오너들과 친하게 지낸 것으로 안다. 에피소드가 있다면.

“문화부 기자 시절이었다. 이병철 삼성 회장이 한국 비료의 사카린 밀수 사건 이후 기자를 피할 때도 골동품 취재 명목으로 그를 만났다. 박동규 전 재무부 장관의 소개로 인연을 맺은 홍재선 당시 전경련 회장이 이 회장에게 전화해준 덕을 봤다. 이 회장은 골프와 미술품·골동품 수집이 취미였다. 고종황제의 아들인 영친왕이 생활고로 도쿄 골동품상에 판 골동품이나 그림, 궁중화가였던 오원 장승업의 그림이 헐값에 거래되는 것을 보고 많이 사들였다. 한번은 ‘사업보국’이 붙어 있는 사무실에 들어서니 용인 자연농원을 만들 때라 목축에 관한 일본 책을 넓은 책상에 산처럼 쌓아놓고 있더라. 이 회장은 처음에는 냉혹하게 폐부를 찔러보는 안광(眼光)으로 나를 바라봤는데, 점차 아버지 눈빛으로 변했다. 오원이 비단에 그린 춘(春)·추(秋) 두 폭의 그림을 보면서 이 회장으로부터 예술품을 모으는 배경도 들었다. 하지만 골동품이나 그가 갖고 있다고 알려진 청동기 칼과 가야금관은 못 봤다.“

이수영(왼쪽 세번째) KAIST 발전재단 이사장이 서울경제신문 기자 시절이던 1980년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서 이병철(〃 두번째) 삼성그룹 회장과 정주영(〃 네번째) 현대그룹 회장 사이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이수영 이사장


- 이병철 회장과 어깨 동무한 사진이 인상적이다.

“서울경제 기자 시절에 전경련 회장단 모임에 취재 갔다가 찍은 사진이다. 1980년으로 기억한다. 이 회장은 골동품 취재로 만난 이후 다음에 만나면 먼저 말을 걸었다. 그 단체 사진도 이 회장이 ‘이수영 기자 이리와’ 하며 정주영 회장과의 사이에 서게 한 뒤 어깨동무를 한 거다. 이 회장 취재 뒤 다른 재벌 회장 취재하기가 용이해졌다.(웃음)”

-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도 친분이 있었다고?

“아주 부지런하고 머리가 좋은 애국자였다. 아침 7시에 인터뷰 오라고 할 정도였으니깐. 1973년 오일쇼크가 왔을 때 정 회장이 선박 모형을 보여주며 ‘내가 선박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라며 조선업의 구상을 비친 일화도 들려줬다. 한번은 유럽·중동 경제사절단 동행취재를 했는데 정 회장이 ‘바레인 아스리조선소에서 한식 잡숴봐요’라고 하더라. 현지인이 안 먹는 꼬리찜으로 맛있게 대접한 거다. 정 회장은 사우디아라비아 연안에서 부두가 없어 하역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때도 빔(철골조)을 엮어 똑딱선으로 끌고 가 임시부두를 만드는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 기자생활을 하다가 목축업에 뛰어든 이유 뭔가.

“서울경제 기자를 하던 1971년 ‘농공병진(農工竝進·농업과 공업이 같이 나아감)’에 공감했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심훈의 ‘상록수’처럼 농촌을 잘살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당시는 전라도 등에서 공장이 없으니 서울로 몰려 드는데 영등포 쪽방촌에서 한 방을 놓고 밤에는 여공이 자고 낮에는 야간작업하는 남공이 잘 정도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러던 차에 목장을 운영하던 주간한국 국장으로부터 돼지 두 마리를 선물받아 경기도 안양에서 목축업을 시작했다. 낮에는 취재를 하고 밤이나 주말에 돼지와 소를 키웠다. ”

이수영 이사장이 소와 돼지 등 축산업을 할 때의 모습./사진제공=이수영 이사장


- 고비도 있었다고?

“그렇다. 한번은 안양천이 범람해 지대가 높은 목장의 문지방까지 물이 찰 정도로 수해가 난 적이 있다. 다음날 물이 빠진 뒤 도처가 진흙투성이에 뱀이 널브러져 있고 풀에는 기름이 묻어 있고 난리도 아니었다. 급한 대로 시장을 다니며 동물 먹일 것을 구했다. 사료로 쓰려고 하천 부지에서 옥수수를 재배해 사일로(원통형 창고)도 만들었는데 예쁜 다리에 상처도 많이 났다.”

- 목장 규모는?

“나중에는 돼지 1,000여마리, 소 15마리 규모까지 목장을 키웠다. 그런데 1979년 돼지 파동으로 돼지 가격이 폭락하고 우유 파동으로 중랑천에 우유를 버리는 업체까지 나올 정도로 또 우여곡절을 겪었다. 정부와 기업에 있는 서울대 법대 동창들을 찾아 돼지는 국군장병 위문품으로, 우유는 초등학교 납품으로 활로를 찾았다. 다른 회사의 반품 우유도 받아 소한테 먹여 소가 부쩍 컸다. 소로 떼돈을 벌었다. 그 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내 덕에 우유 먹고 저렇게 됐다’고 했다. 머리를 써야 한다.(웃음)”

- 모래는 어떻게 팔게 됐나.

“목장 땅이 경인고속도로 나들목(IC)으로 수용돼 애환이 심했다. 건강도 좋지 않고 목장 일도 다시 할 수 없게 돼 좌절에 빠졌다. 그때 누군가 목장 하천의 모래를 퍼간 것을 보고 ‘아차’ 싶었다. 1988년부터 하루 종일 모래와 흙먼지 마셔가며 모래를 팔았다. 옷 전체는 모래와 흙먼지로 뒤덮였지만 그래도 돈 쌓이는 재미에 힘든 줄 모르고 일했다.”

/이호재 기자


- 많은 돈을 모았을텐데 또다시 새 사업을 시작했다. 대단한 열정이다.

“열심히 노력한 것도 있지만 사업은 운도 중요한 것 같다. 운이 내 앞을 지나갈 때 붙잡느냐 놓치느냐에 따라 결과는 큰 차이가 난다. 당시 은행에 다니던 대학 동기가 힌트를 줘 주차장이 넓은 여의도백화점(현 맨하탄빌딩) 한 층을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이 과정에서 전기도 꺼져 난장판인 건물을 정비하는 데 철거업자가 2,000만~3,000만원 달라는 것을 직원들과 같이 100만원에 다 수리했다. 증권예탁원 등 공공기관 여러 곳이 입주하는 등 초반부터 일이 잘 풀렸다.”

- 일이 계속 잘 풀렸나.

“아니다. 빌딩 관리 책임을 맡은 상황에서 집합건물관리단에서 예치한 3억원을 노린 조폭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도 했다.1998년인가. 깡패 100명이 쳐 들어와 관리권을 빼앗으려 했다. 청부살인을 당할 수도 있겠다 싶어 한 밤에 대전으로 피신해 한 달 쯤 살았다. 그때 받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신장암에 걸렸고 왼쪽 신장을 잘라냈다.”

-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나

“좌절을 겪을 때도 누구를 원망하지 않았다. 끈만 잡으면 확 일으키고 별 밑천 안 들이고 키워왔다. 난 오뚝이 인생이다. 나폴레옹처럼 ‘불가능이 없다’는 마음으로 살았다. 목장일도, 모래판매일도, 부동산일도 그렇게 했다.”

- 많은 부를 쌓았다. 돈에 대한 철학이 궁금하다.

“돈은 필요할 때 쓰는 것이다. 나라와 사회를 위해 쓸 때 보람 있다. 나만 잘살면 안 된다. 큰돈은 명분이 있으면 쓰지만 조그만 돈은 아낀다. 휴지 한 장도 반절로 접어서 쓴다.”

- 원조 N잡러라 부를 만큼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다. 원래 꿈은 뭐였나.

“초등학교 때 ‘자라서 뭐가 될 거냐’고 물으면 자선사업가라고 했다. ”

이수영(오른쪽) KAIST 발전재단 이사장이 지난달 23일 대전 유성구 카이스트(KAIST) 학술문화관에서 676억원 상당의 자산 기부를 약정한 뒤 신성철 카이스트 총장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KAIST


- 지난달 KAIST와 676억원의 부동산을 출연, ‘이수영 과학교육재단’을 설립하기로 했다. 평생 모은 재산을 KAIST에 기부하기로 한 이유는.

“법대를 나왔지만 법조인의 길을 걸은 것도 아니고, 장사꾼의 삶을 살았다. 서울대 법대 나오면 사회지도층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직무를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람이 있어 싫증이 나기도 했다. 법조인보다 과학기술자를 키우는 일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해 기부를 결심했다.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의 16%를 차지하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석·박사 연구인력 25%가 KAIST 출신 아닌가. KAIST가 내년 개교 50주년인데 이제 노벨상도 받을 만하지 않나. 뜻있는 분들은 동참해줬으면 좋겠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
서민우 기자
ingagh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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