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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 백진호 원장 "약 짓고 달이는 마음처럼···내면까지 치유하는 그림집 짓죠"

■백진호 대추밭백한의원 원장

불임치료 명성 한의원 5대째 가업 이어

미술계선 '뚝심있는 컬렉터'로 알려져

부산 구옥을 갤러리로 개조해 전시 후원

동의보감 초간본·옹기 200여점 등 수집

새 한옥미술관 겸 병원 건립 준비만 5년

"작품이든 집이든 약이든 정성 품어야

사람을 낫게하고 행복하게 할 수 있어"

백진호 대추밭백한의원 원장은 이제석 이제석광고연구소 소장과 함께 경주의 문화유산과 임신의 고귀함을 연결시킨 출산 장려 캠페인을 2년째 전개하고 있다.


옷 짓고 밥 짓고 집 짓는 일은 삶을 영위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의식주를 이룬다. 행복한 삶을 위한 필수불가결 요소 하나를 더하자면 건강이니, 건강을 지켜주는 약(藥)도 옷·밥·집과 마찬가지로 ‘짓는다’. 약 짓는 한의사가, 그것도 보통 의사가 아니라 5대째 가업을 이어 130년간 한약을 지어온 한의사가 ‘그림집(미술관)’ 짓는 일에 공을 들이고 있다. 고미술부터 현대미술까지 관통한 애호가이자 컬렉터이기도 한 백진호 대추밭백한의원 원장이다.

그는 부산시 초량동의 가파른 언덕배기 골목에 지난 1970년대에 들어선 낡은 주택을 리모델링해 지난해 ‘스페이스 매트리스’ 개관을 주도했고 전시 후원을 도맡고 있다. 산복도로의 옛집을 허무는 대신 부산항 조망권이 탁월한 ‘오래된 새집’으로 개조하는 것을 택했더니 자연스레 도시 재생과 연결됐다. 구옥을 손봐 젊은 작가 후원 전시를 연 백 원장은 지난봄 한옥에서 열리는 팝아트 전시까지 기획했다. 국제펜대회 기념 도서관으로 조성된 경주의 명소 문정헌(文井軒)에서 김서한·아트놈·임지빈 등 젊은 팝아티스트가 참여한 ‘팝 앤드 팝 앤드 팝’ 전시가 지난달 24일까지 진행됐다. 특히 ‘구찌’ 등 다양한 브랜드와의 협업으로도 유명한 임지빈 작가의 거대한 베어 캐릭터가 한옥 문을 비집고 나온 설치 장면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화제를 모았다.

백진호 대추밭백한의원 원장이 공간을 내놓고 후원하고 있는 부산시 초량동의 스페이스 매트리스 전경. 부산의 원도심이 보이는 곳으로 백 원장과 예술가·건축가가 머리를 맞대고 오래된 집의 리모델링을 진행했다. /사진 제공=백진호


미술계에서는 뚝심 있는 괴짜 수집가로 알려진 백 원장을 만나기 위해 14일 찾아간 경주의 한의원에서는 뭉근하게 달이는 약 냄새가 사람보다 먼저 손님을 맞았다. 천마총·첨성대와 인접했고 황오리 고분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목조건물의 한의원은 시간이 느리게 가는 천년고도 경주에서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양 자연스럽게 둥지를 틀고 있었다. 경주시 외곽 건천읍에 대추 ‘조(棗)’자에 밭 ‘전(田)’자를 쓴 조전리가 있는데 백(白) 씨 집성촌인 그 마을에서 대추밭백한의원의 역사가 시작됐다. 약방을 운영하던 백진호 원장의 고조부가 자손이 생기지 않자 스스로 처방한 약을 복용하고 임신에 성공했는데 그 소문이 경상도 일대로 퍼지면서 ‘대추밭백약방’은 불임 치료의 명소가 됐다. 3대 백길성 원장이 1970년에 지금의 경주시 황오동의 ‘시내’로 병원을 옮긴 후로도 50년이 훌쩍 지났지만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컬렉터의 방답게 백 원장의 진료실 가운데 자리는 그림이 차지했다. 붉은색·주황색·선홍색의 색면 추상화 3점이 꼭 끌어안아주는 엄마 품처럼 온기를 전한다.

“‘순천만의 화가’로 불리는 김일권 전남대 교수의 작품입니다. 그전에는 ‘숯의 화가’ 이배 작품이 걸려 있었는데 나무가 불을 거쳐 이뤄낸 숯이라는 소재가 매력적이었죠. 김일권의 작품으로 바꿔 걸 때는 색상을 중시해 골라봤습니다. 아무래도 여성 환자들이 월등히 많아 정서적인 부분을 고려했어요.”

한의학을 전공했음에도 가업을 잇는 노포의 자제들이 그러하듯 한때는 백 원장도 숙명에서 벗어나려 일본으로 떠났다. 어머니의 타계와 맞물려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고 어머니의 취미였던 골동 수집을 이어받았다.

“어려서부터 재즈를 좋아해 명연주자도 탐내는 명품 색소폰을 여러 점 모았습니다. 수집의 철칙은 ‘어설픈 거 모으면 안 된다’인데요. 100원짜리는 100개 모아도 100원이니 만 원짜리 하나를 가져야 제대로 된 수집이라 생각합니다. 공부하느라 본 한의학 고서 수집으로 자연스레 옮겨가 허준의 ‘동의보감’ 초간본까지 수중에 넣었습니다. 컬렉터는 절대 조급해서는 안 됩니다. ‘동의보감’은 소장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상속받은 유족이 내놓는 바람에 품에 안게 됐습니다. 수집을 통해 기다림도 배우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동의보감’ 초간본은 국보 제319호로 지정돼 있기에 백 원장의 소장품도 ‘국보급’으로 평가된다. 그렇다고 국보·보물만 귀히 여기는 것은 아니다. 그의 한의원 뒤뜰에는 전국 각지에서 가져온 몇백 년 된 옹기들이 200여점 모여 있다. 강원도에서 제주도까지 지역별 특성이 형태로 구분되고 항아리의 육중한 규모로 미루어 여염집을 초월한 규모 있는 종가의 물건임을 눈치챌 수 있다.

미술 애호가이자 후원자로 유명한 괴짜 수집가 백진호 경주 대추밭백한의원 원장.


“이 항아리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 드렸던 애틋한 기도들이 얼마나 많고 그 마음은 또 얼마나 깊겠습니까. 약 짓고 달이는 마음도 그와 마찬가지라 수집한 것이 이렇게 모였습니다. 풍요롭고 넉넉한 모양새에 어머니의 마음이 담겨 있으니 귀하지요.”

어떤 이는 투자를 생각하며 그림을 모으고 땅과 집을 사건만 백 원장은 투자 이상의 가치를 추구한다. 건축과 미술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은 마흔을 넘기며 생겨났다.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양동마을의 300년 된 고택을 5년간 기다려 구입했다. 개발이 불가능한 땅임에도 백 원장은 고택이 지닌 그 자체의 가치를 값지게 여겼다. 1999년 무렵 지금의 한의원은 증축을 위해 문화재 발굴 조사를 의뢰했다 유구가 발견되면서 사적지로 지정됐다. 문화재보호지역이 됐으니 옮길 수밖에 없게 됐다. 이는 미술관과 한의원을 겸한 ‘치유의 집’을 구상하는 계기가 됐다.

백 원장은 “놀면서 몸과 마음을 치료하는 문화 치유의 시대”라며 “치료보다 우선 스스로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법을 알게 하는 것이 문화 치유인데 병을 낫게 한다는 치유(治癒)가 아니라 놀면서 낫게 한다는 치유(治遊)”라고 이야기 한다.

“현대사회의 난임률이 7쌍 중 1쌍, 약 14% 정도로 추정되는데 늦은 결혼과 늦은 임신 시도가 큰 이유지만 원인 불명 난임의 비중이 약 30%이고 점점 높아질 것이라는 게 큰일이죠. 병의 근본적인 문제는 약이 아니라 우리 몸에 기인하는 것이니 우리의 몸을 바꿔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 테베 도서관에는 ‘영혼을 치유하는 곳’이라는 글이 걸려 있었고 프랑스 리옹 병원의 한 의사는 ‘좋은 책은 많은 의학보다 낫다’면서 처방전에 읽을 만한 책 제목을 적어줬대요. 저도 그런 치유를 겸한 문화의 집을 지으려고 합니다.”

백진호 대추밭백한의원 원장이 공간을 내놓고 후원하고 있는 부산시 초량동의 스페이스 매트리스 전경. 부산의 원도심이 보이는 곳으로 백 원장과 예술가·건축가가 머리를 맞대고 오래된 집의 리모델링을 진행했다. /사진 제공=백진호


시간 날 때마다 세계 각지로 미술관 투어를 다녔다. 스페인의 상파우 병원은 ‘예술로 치료한다’는 주장으로 유명하다. 그 병원을 지을 때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첨탑이 보이게끔 건물을 45도 틀어서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여기에서 백 원장은 “위대한 건축가는 단순히 건물만 아름답게 짓는 것이 아니라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오래 생각해야 잘 짓는다는 생각으로 김재경 한양대 건축과 교수팀과 옮겨갈 한옥미술관 겸 병원을 짓기 위해 5년째 개념부터 설계까지 ‘느리게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시간을 품고 정성을 품은 것은 작품이든 집이든 약이든 사람을 낫게 하고 행복하게 만든다는 믿음이 그를 움직이는 동력이다.
경주=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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