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기술 중심지 실리콘밸리에서 10년차 테크니컬 라이터로 활발히 활동하던 패트릭 라이든(43)씨. 고액의 연봉과 비싼 차 등 남들이 ‘성공했다’고 평가할 만 한 요소는 거의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순간이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할 땐 늘 사람들과 다투고 서로 경쟁해야만 했어요. 사람들과 맺는 모든 관계가 협상이고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거래 같았어요.”(라이든)
이런 과열된 경쟁이나 물질의 구속에서 벗어나 ‘더 나은 삶’을 원했던 그는 지난 2011년 동아시아 여행을 떠났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한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던 강수희(41)씨. 그도 여느 또래들과 마찬가지로 수능을 치르고 취업 준비를 거쳐 직장에 들어갔다. 보람은 잠시, 풀리지 않는 의문이 그의 곁을 맴돌았다. “환경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책들을 만드는데, 정작 저는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빌딩숲 안에 갇혀 지내고 있더라고요. 햇빛도 제대로 못 보면서 지내는 저를 보며 평생 이렇게 지낼 수 있을지 고민이 깊어갔어요.”(강씨)
강씨는 주말이면 텃밭에서 작물을 가꾸거나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곳곳을 소개하는 가이드를 하면서 답답함을 풀곤 했다.
이랬던 둘은 2011년 여름 우연히 만났다. 한국을 찾은 라이든씨가 여행자들이 찾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강씨에게 가이드를 요청한 것. 둘은 많은 대화를 나눴다. 태어나서 자란 곳, 인종 등 많은 점이 다른 둘이었지만 통하는 점도 있었다. 바로 압박으로 가득한 도시의 삶에 염증을 느끼며 대안적인 삶을 꿈꾸고 있다는 것.
라이든씨는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둘의 인연은 계속됐다. 온라인 채팅으로 함께할 수 있는 일을 논의하다가 생태환경 관련 프로젝트를 추진해보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이듬해인 2012년 여름. 둘은 각자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웹진 ‘소사이어시티(Sociecity)’를 창간했다. 둘은 웹진의 콘텐츠 중 하나로 자연농(땅을 갈지 않고 거름을 주지 않는 등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인위적인 행동을 하지 않고 자연이 지닌 생명력을 살려 농사를 짓는 방식) 농부를 인터뷰했는데, 이를 계기로 자연농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3년 반 동안 11명의 자연농 농부를 인터뷰해 만든 64분짜리 다큐 ‘자연농: final straw’는 그렇게 세상에 공개됐다. 2015년 서울부터 거창, 순천, 미국 캘리포니아, 일본 홋카이도 등 120개 도시에서 상영회가 열렸다. 유튜브에 올린 20분짜리 축약본은 현재 35만 뷰를 넘겼다. 둘은 현재 대전 보문산 끝자락에 터를 잡고 생태예술 창작그룹 ‘City as nature’를 운영하는 동업자이자, 부부다.
도시를 떠나 대안적인 삶을 갈구했던 둘. 이들은 자연농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필요하지 않은 것은 억지로 하지 않고 스스로 길을 찾는 일. 자연과의 교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들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알게 됐다고 한다.
“도시는 ‘함께 사는 방법’을 잊은 듯 했어요. 반면 자연은 공생하며 살아남더라고요. 자연의 조화나 공존, 상생 같은 개념을 도시에 전파함으로써 도시가 현재 갖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라이든씨)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실천하는 방법이 꼭 농사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부부는 농사 대신 도시와 자연을 연결하는 방법으로 생태예술을 택했다. 도심에 사는 이들이 자연을 느껴보고 쉼을 얻으며, 자연과 연결할 수 있는 작품들을 직접 만들어보는 다양한 워크숍을 진행하는 것. 워크숍에서 만들어보는 작품으로는 잎이나 씨앗으로 만다라(기하학적인 패턴) 만들기, 풀과 꽃이나 흙으로 물감 만들어 그림 그리기, 잎사귀로 엽서 만들기 등이 있다.
이들이 하는 일은 또 있다. 강씨는 허브 꾸러미를 만들어 판매하기도 한다. 허브를 활용한 제빵 클래스를 열기도 하고 허브 관련 칼럼도 매체에 기고한다. 라이든씨는 뉴욕에 거점을 둔 비영리단체 ‘The nature of cities’에서 문화예술 기획자로 일한다. 물론 온라인으로 원격 근무를 하는 식이다.
‘N잡러’가 된 이들. 과거보다 불안정할 수 있지만 둘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 라이든씨는 “예전에는 주어진 일만 했는데 지금은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내가 동의하지 않는 일은 맡지 않는다”며 “삶의 주도권을 내가 갖고 있어서 이런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말했다. 강씨는 “내 에너지를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쏟을 수 있어 좋다”며 “일과 나 자신이 일치된 느낌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소비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왔다. 부부는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은 사지 않는다. 덕분에 집도, 차도 없다고 한다. 필요한 물건은 새것을 찾기보다 중고 물품을 구해 고쳐서 쓴다. 물질이 주는 풍요로움이 행복의 필수조건은 아니라는 걸 깨달은 덕분에 이런 생활이 가능하단다. 부부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지만 시도가 두려운 중장년에게 “자신만의 진실을 찾아보라”고 조언했다.
“저도 이런 삶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어요. 그런데 되돌아보니 지난 2011년 여름에 저희가 다짐했던 대로 살고 있더라고요. 운 좋게도 비슷한 고민을 하던 저희가 만났고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요. ‘다른 길을 찾고 싶다’는 진지한 의지가 있다면 어떻게든지 길은 찾을 수 있는 것 같아요.”
- 정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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