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인생 2막’이라고 여행도 다니고 취미 생활도 마음껏 하며 산다지만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즐거울 수 있을까요?”
퇴직을 앞둔 이들을 위한 각종 정보를 제공하는 유튜브 채널 ‘현명한 은퇴자들’의 소개말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은퇴 후 여러 나라로 여행을 다니는 풍족한 삶을 꿈꾸기에 앞서 어떻게 준비해야 은퇴 후 궁핍한 삶을 마주하지 않을지를 더 궁금해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현명한 은퇴자들 운영자에게 인터뷰를 요청했고, 지난달 17일 경기 성남시의 한 작업실에서 운영자 이범용(52)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저는 실패의 아이콘인 것 같습니다. 전반적으로 뛰어난 것 하나 없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월급 외의 돈을 벌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 거죠.”
올해로 20년차 직장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씨는 스스로를 ‘실패의 아이콘’이라고 칭하며 멋쩍게 웃었다. 약 4만 명의 구독자를 확보했다면 ‘초대박’까지는 아니더라도 ‘중박’ 이상은 달성한 채널인데, 왜 실패의 아이콘이라며 자신을 낮출까. 이 씨는 이 채널을 시작하기 전 6개의 유튜브 채널을 운영했지만 모두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했다. 그나마 괜찮았던 채널의 구독자도 3700명에 그쳤다고. 현명한 은퇴자들과 비교하면 현저히 낮은 수치다. 이것만으로 실패의 아이콘이라고 부르기엔 부족하지 않을까. 이 씨는 이제껏 수많은 도전과 실패를 겪어왔다며 그간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지난 20년 동안 총 14번의 퇴사와 이직을 반복했다. 이 씨에게 직장생활은 유독 고되고 힘들었다. 상사와 갈등이 생길 때면 어릴 적 아버지께 심하게 훈육 받던 상황이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참지 못하고 사표를 냈다. 도망치고 회피하는 삶은 한동안 이어졌다. 퇴사가 반복될수록 이직 없는 ‘완전한 퇴사’를 향한 갈망은 커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내일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싶었지만, 아내와 자식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이런 그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술과 담배였다.
“주말이면 하루 종일 집에서 시체처럼 누워있곤 했어요. 아이들이 놀아달라고 해도 제 마음이 힘들고 여유가 없으니 화만 냈어요.”
엉망이었던 생활 습관은 이 씨의 몸을 망가트렸다. 체중은 급격하게 늘고 몸 이곳저곳이 아프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그의 아내가 나섰다. 독서를 통해 자기계발을 하는 모임에 이 씨를 강제로 등록한 것. 2017년의 일이다.
“아내가 ‘비싼 회비를 냈고 취소도 안 되니 꼭 다녀야 한다’고 했어요. 거의 반강제로 모임에 나가야만 했지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독서토론 모임이었는데, 그 모임이 이 씨에게는 삶의 전환점이 됐다. 당시 읽은 스티븐 기즈의 ‘습관의 재발견’이 특히 그에게 큰 자극을 줬다. 습관이 지닌 강력한 힘에 매료된 이 씨는 모임 멤버들과 ‘습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각자의 습관을 정하고 성공 일지를 작성하는 식이었다. ‘하루 두 문장 글쓰기’, ‘팔굽혀펴기 2개 하기’ 같은 작은 습관을 꾸준히 해나가면서 이 씨의 일상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무기력했던 일상에 활기가 더해지면서 퇴사만 생각하던 직장인이 3권의 책을 쓴 작가로 거듭난 것. 2017년 ‘습관홈트’라는 책을 낸 데 이어 이듬해에는 ‘우리아이 작은습관’을, 그다음 해인 2019년에는 ‘습관의 완성’이라는 책을 펴냈다.
코로나19는 많은 이들의 일상을 바꿔놓았다. 이 씨 부부의 삶도 그랬다. 2020년 코로나19가 한창이던 때 이 씨의 아내는 회사 동료가 퇴직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성과가 좋던 동료였지만 회사가 어려운 상황에 놓이자 사실상 강제로 회사 밖으로 떠밀려진 것이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그의 아내는 이 씨의 손을 잡고 프랜차이즈 창업 컨설팅 업체를 찾았다. 이는 또 다른 실패의 시작이었다.
이 씨 부부는 반 년 새 필라테스 학원과 쌀국수 식당을 동시에 열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필라테스 학원은 5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쌀국수 식당은 3년을 이어갔지만 거듭된 적자에 지난해 7월 폐업했다. “아내와 저 둘 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점포를 내기 전에 시장조사를 꼼꼼하게 해야 했는데, 불안한 마음에 생각이 짧았어요.”
좌절하며 넋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 씨는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섰다. 우선 지난 20년간 해외 인턴, 외국계 기업 근무, 해외 주재원 등으로 일하면서 모아뒀던 영어 노트를 정리해 전자책으로 만들어 ‘크몽’이라는 프리랜서 마켓 플랫폼에 올렸다. 해외 구매대행, 온라인 강의, 네이버 스마트스토어 등 다른 수입원도 개척했다. 여러 개의 ‘파이프라인’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돈에 관한 그의 생각도 바뀌었다. “판매율이 아주 높진 않지만 용돈 정도는 들어와요. 예전에는 이런 적은 돈을 하찮게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니에요. 높은 수익을 내지 않더라도 꾸준히 돈이 들어올 수 있는 파이프라인을 만드는 게 정말 중요하거든요.”
이 씨는 자신이 겪은 실패와 성공의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이들에게 길잡이가 될 수 있는 ‘멘토’의 꿈을 꾸게 된 것. 그런 마음으로 시작한 유튜브 채널이 ‘현명한 은퇴자들’이다.
“처음에는 막연한 불안감에 하나의 파이프라인을 더 만들자는 생각이었는데, 이렇게까지 성장할 줄은 몰랐어요.”
이 씨 혼자 알아내는 정보는 한정적인 만큼, 그는 유용한 정보를 줄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그들과의 인터뷰를 영상에 담아 공개하니 구독자가 점차 늘었다.
이 씨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면서 자신의 은퇴 계획도 꾸준히 업데이트하고 있다. 배당주 투자로 50세에 은퇴한 유튜버 ‘쭈압’을 만난 뒤로는 배당주 투자에 발을 들였고, 개인형퇴직연금(IRP)과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도 채널을 운영하며 만난 전문가들을 통해 알게 됐다. 파이프라인을 여러 개 만들고, 투자도 하고 있지만 아직 은퇴를 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이 씨. 그는 “지금 가진 돈으로는 당장 은퇴를 할 수는 없다”면서도 “현명한 은퇴자들 채널이 더욱 성장하고 지금 다니는 회사도 그만두게 된다면 방송이나 라디오에도 정기적으로 출연하고 싶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PD를 꿈꿨던 이 씨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면서 그 갈증을 어느 정도 해소했지만, 향후에는 방송 진행자로도 활동하고 싶다고.
이 씨는 그때까지 꾸준히 새로운 도전을 이어갈 생각이다. 지금도 인공지능(AI)을 활용한 8번째 유튜브 채널을 계획하고 있고, 틈틈이 네 번째 책도 쓰고 있다.
”제가 하는 노력이 언젠가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거라는 믿음으로 살았어요. 그 결과, 실패한 경험도 결국 도움이 됐고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이건 저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 양진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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