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말 들이닥친 외환위기의 상처가 아직 회복되기 전이었다. 어려움을 겪던 기업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위기를 이겨내려 했다. 당시 20대 후반이던 박현선(53) 씨가 몸담고 있던 한 건설사도 어려움을 겪긴 마찬가지였다. 임신을 하고 육아휴직을 신청한 박 씨에게 회사는 희망퇴직을 할 것을 권고했다. 전 직원 중 여성은 10%에 불과한 대표적 남초(男超) 업종인 건설 업체를 다니면서도 “넌 당연히 임원까지 갈 것”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능력이 출중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박 씨였지만, 회사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평가는 무용지물이 됐다. 그렇게 박 씨는 직장을 나와야만 했다.
이후 지인들의 소개로 다른 건설사에 취업했지만, 둘째를 가지면서 또 다시 퇴직할 수밖에 없었다. 첫째가 유치원을 다닐 때에는 짬을 내서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고 사무실에 나가기도 했지만, 커갈수록 엄마 손을 더욱 필요로 하는 아이들에 집중하기 위해 중개 일도 그만두고 말았다.
자녀들에게 최대한 사랑을 쏟고 싶은 게 박 씨의 마음이었다. 아이들이 뱃속에 있을 때부터 각종 책을 읽으며 육아를 공부하고, 출산 후에도 영양소를 고려한 식단을 짰다. 책 읽는 걸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책을 맘껏 사주고 싶은 마음에 한 때는 가정방문교사로도 일했다. 직원이 되면 육아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자사의 도서를 구매할 때 할인을 받을 수 있다는 혜택이 끌렸기 때문이다.
박 씨는 가르치는 일에도 금세 재미를 붙였다. 어린 시절 선생님을 꿈꿨기 때문인지, 짧은 수업시간임에도 학생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학부모에게도 진심을 다했다. “저와 수업을 하면서 아이들이 점차 바뀌는 모습을 보는 게 뿌듯하고 좋았어요. 예전에 지도한 학생과 학부모로부터 시간이 지난 뒤에도 ‘고맙다’, ‘다시 선생님으로 와달라’는 연락도 많이 받았고요.”
박 씨는 입사 4년 만에 다른 교사를 지도하는 ‘지구장’이라는 자리까지 올랐다. 이어 지국 전체를 관리하는 ‘지국장’ 직책까지 제안 받았지만, 일에 매몰돼 온전히 자녀들을 돌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거절했다. 이후 박 씨는 다른 건설사를 다니는 등 ‘워킹맘’으로 최선을 다했다.
이랬던 박 씨에게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코로나19 때문이었다. 다니던 회사에서 나왔지만 여러 경험을 쌓았기에 어느 곳이든 다시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믿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심지어 취업이 아닌 교육을 받는 프로그램마저 수강생 선발을 위한 면접에서 떨어지자 박 씨가 느낀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래 주저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당장 돈을 못 번다면 자기계발이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박 씨는 집 근처 강동50플러스센터를 찾았다. 서울시는 중장년의 생애설계와 직업교육, 일자리 등을 지원하기 위해 서울시50플러스재단을 설립하고 각 자치구와 함께 지역별로 50플러스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박 씨는 이곳에서 청소년미래설계전문가 자산 파트 강의를 수강했다. 자녀들의 경제 교육을 직접 해주겠다는 생각에서다. “자격증 취득과 연계되는 강의라는 것은 알았지만, 사실 자격증을 딸 생각은 없었어요. 그저 아이들 경제 교육을 해주고 싶은 마음에 신청했을 뿐이었지요.”
함께 강의를 듣는 동료들과 함께 박 씨도 얼떨결에 자격증을 손에 쥐었다. 이는 박 씨에게 강사라는 새로운 업(業)을 연결해준 계기가 됐다.
시작은 순조로웠다. 강의를 연결해주고 일정 등을 관리해주는 에이전시에서도 박 씨를 좋게 평가한 덕분에 그는 비교적 많은 강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학교로 강의를 나갈 때면 다양한 연령대의 학생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고등학교에서는 제가 있는 바로 앞에서 엎드려 자는 학생을 보며 무력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졸지 않고 강의에 집중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더 재미있는 방식으로 강의하려고 노력했어요.”
일을 더해갈수록 더 잘, 더 많이 강의를 하고 싶다는 의욕이 커져서일까. 박 씨는 전문성을 입증할 추가 자격증과 공부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그는 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이 진행하는 ‘인생디자인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인생디자인학교는 중장년들이 ‘인생 2막’을 열어가기 위해 자신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설계해보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전문성을 높이려 노력한 덕분에 박 씨는 지난 7월 금융감독원이 인증하는 금융교육전문강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새로운 강의처를 물색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새로운 분야의 강의 기회를 얻었고,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진행하는 ‘디지털안전&보안교육 전문 강사 양성 과정’의 주 강사로 발탁되기도 했다.
박 씨의 일상은 더욱 바빠졌지만, 그는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단다. “다시 만나고 싶은 최고의 강사가 돼 전국을 돌며 강의를 하는 게 제 로망이에요. 지역 곳곳에서 강의를 하고 2, 3일 정도는 그 지역에서 머무르며 여행도 하고 문화와 특색도 경험하며 보냈으면 좋겠어요. 여행비용은 강의료 받은 걸로 충당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박 씨의 최종 목표는 앞으로 10~15년 뒤에도 계속 다른 이들에게 동기부여가 되는 사람이 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실패하더라도 계속 무언가를 시도하는 삶을 살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환경 강사 양성 교육에서 70대 수강생을 뵌 적이 있어요. 그분을 얼마 전 강사 모임에서 만났는데, 직접 인공지능(AI)을 활용해 만든 책을 들고 오셨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며 저도 나이를 먹어도 더 배우고 적극적인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했지요. 행여 실패하더라도 계속 무언가를 시도하는 삶을 살아보려 해요.”
※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은 4050 중장년의 직업 전환을 위한 ‘서울런 4050’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중장년이 자신을 진단하고 ‘인생 2막’을 설계해보는 ‘인생디자인학교’를 운영한다. 라이프점프는 인생디자인학교를 통해 성공적인 인생 2막을 준비하고 있는 중장년들의 이야기를 공유한다.
- 양진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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