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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만든 가방 한번 보시겠어요?

3번의 올림픽에서 5개 메달 획득한 박승희의 이유있는 변신

디자인하랴, 택배 붙이랴, 선수시절보다 체중 6Kg 줄어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을 한 달쯤 앞두고 스피드스케이팅(빙속) 국가대표 박승희 선수를 만났다. 그는 “평창 올림픽을 끝으로 은퇴하면 어릴 때부터 꿈꿨던 의상 디자이너에 도전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 디자이너로 변신한 그를 다시 만났다.

직접 디자인하는 가방 브랜드 ‘멜로페’를 지난 9월 론칭한 그를 서울 후암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작은 공간의 한쪽은 예쁘게 진열한 제품들이, 또 다른 한쪽은 양껏 쌓아 놓은 제품들이 차지한 가운데 박승희는 컴퓨터 화면 속 일정과 각종 그래프, 디자인 시안 등을 열심히 확인하고 있었다.

새 일을 즐겁게 해내고 있느냐고 묻자 박승희는 “정말 재밌게 하고 있다. 어려움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직 그렇게 심각하게 어려웠던 적은 없다”고 밝은 표정으로 답했다. 사업이 잘되느냐는 물음에는 “잘된다는 것의 기준이 애매모호해 잘 모르겠다”고 한발 물러섰지만 “잘나가는 아이템은 품절도 된다”는 말에서는 대표로서의 자신감도 묻어 나왔다.

박승희는 한 번 나가기도 어려운 올림픽을 세 번이나 경험하고 5개의 메달을 모은 한국 빙상의 대표 스타 중 한 명이다. 열 여덟이던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서 동메달 2개, 2014 소치 올림픽에서 금 2, 동메달 1개를 땄다. 평창 대회를 앞두고는 쇼트트랙에서 빙속으로 전향해 한국 빙상 최초로 올림픽 두 종목 출전 기록을 남겼다.

세 차례 올림픽 무대에 선 뒤 박승희는 미련 없이 빙판을 떠났다. 어릴 적부터 꿈꿔 왔고, 17년 선수 생활 동안에도 취미로 놓지 않았던 패션 디자인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디자이너 박승희로 다시 만나 반갑다. 꿈이 이뤄졌는데.

“반갑다. (하하) ‘에스모드 서울’이라는 글로벌 패션 스쿨의 한 달 과정 클래스를 수강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수업을 듣고 다음날 새벽까지 과제에 매달리는 생활을 했는데 과제가 어찌나 많던지. 하루 1~2시간 자고 학교 가는 날도 많았다.

그런 경험이 처음이라 그랬을까. 오히려 재밌었다. 운동할 때는 잠 못 자면 정말 큰일이었는데 이쪽은 상관없더라. (하하)“

-평생 운동만 했는데 직업을 바꾸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두렵진 않았나.

“쇼트트랙 하다가 빙속으로 가고, 또 디자인을 한다고 하니 ‘어떻게 저렇게 쉽게 다른 길로 뛰어들지?’ 하시겠지만 고민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막상 사업을 시작하려니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무척 크게 밀려오더라. 그쪽 분야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얘기를 들으면 시작도 하기 전에 자신감이 확확 떨어지고 혹시 모를 안 좋은 시선들에 지레 겁도 먹고... 그때 번 아웃 증후군(심신이 탈진한 상태)이 크게 왔다. 자존감이 떨어져서 부정적인 말만 하게 될 정도로.”

-어떻게 극복한 거지?

“한국에 있고 싶지 않아서 영국으로 떠났다. 작년 4월부터 반년간 영국 남부 해안 도시 브라이턴의 현지 노부부 집에서 홈스테이를 했다. 눈을 뜨면 느껴지는 공기부터 달랐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타지에 떨어져서 살아본 경험은 처음이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없이 오로지 스스로한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석 달간 아무 계획 없이 머리를 하얗게 비우니 새로운 계획이 스스로 찾아 오더라. 재미 삼아 가방 디자인 도안들을 쓱쓱 그려 봤더니 꽤 괜찮은 그림들이 나온 거지. 한국으로 돌아와서 공방을 다녔다. 이것저것 시제품을 만들어 본 뒤 브랜드를 만들었다. (제품을 가리키며) 날개와 지붕을 형상화한 디자인이 특징인 나의 브랜드다.“

-영국 생활이 하나의 계기가 된 셈이네. 회사 구성은 어떻게 돼 있나.

“멜로페의 직원은 단둘이다. 나와 언니 박승주 이사. 내가 생산과 디자인 업무를 전담하고 7개월 된 아기의 엄마인 언니는 세무와 홈페이지 관리 등을 맡고 있다. 나는 사무실 업무를 보고 공장 샘플실 세 곳을 돌고 미팅을 하고 택배를 직접 싼다. 선수 시절보다 체중이 6㎏이나 줄었다. 여기저기 돌려면 운전만 하루 3시간씩 하는 날도 많다. 쉬는 날에는 밀린 일을 한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한 계절이 지났는데 선수 때와 비교해서 어떤가.

“선수 때는 몰랐던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 스스로를 수더분하고 털털한 성격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 일을 하고 보니 모든 일을 마지막에는 직접 일일이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더라. 사서 고생하는 느낌이랄까. (하하) 선수 때처럼 눈에 보이는 경쟁은 없지만 스스로 만족할 만큼의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 자체가 결코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다. 그런데 고객으로부터 제품에 대한 구체적인 반응을 들을 때는 정말 흥미롭다.”

-사업이 주는 스트레스가 만만찮을텐데. 스트레스 해소는 스케이팅으로?

“(하하) 은퇴 이후에 스케이트를 신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예상과 다르지?

가족이나 아주 가까운 사람들을 빼면 운동 쪽에 남을 것이라고 예상한 분들이 99%였다. 현실적으로 생각했다면 아마 그게 정답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런 고정관념대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걸 깨고 싶었다. ‘운동선수도 저렇게 할 수가 있구나’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고 할까. 어떻게 보면 힘든 길을 택한 건데 후배들 응원이 큰 힘이 됐다. 선수 때부터 보면 나처럼 다른 일을 해보고 싶어하는 동료들이 제법 있었다. 전례가 거의 없다 보니 마음만 가지고 있었던 거지. ‘부럽다’ ‘언니처럼 하고 싶다’는 후배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지금도 활력소다.”

-평창올림픽 개회를 한 달 앞두고 만났던 것 기억하나. 그때 이렇게 말했다. “하고 싶은 것에 망설이지 않고 도전했던 선수로 동료들과 팬들에게 기억되고 싶다”고.

“아무렴 기억하지. 마지막 올림픽을 치른 뒤에 생애 처음으로 팬미팅을 해봤다. 얼마 안 되지만 수익금 전액은 기부했지.

얼마 전 우리 엄마보다 연배가 있어 보이는 여성분이 우리 가방을 멘 사진을 보내주시면서 행복해하신 게 잊히지 않는다.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행복하게 하고 있는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전해드릴 수 있는 그런 브랜드로 가꿔 나가고 싶다.”

2018 평창올림픽에 출전한 박승희 선수


-선수 시절때부터 틈틈이 공부한 건가.

“운동에 집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쉴 때 집중할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는데 그게 패션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휴대폰으로 시즌별 패션쇼를 다 챙겨 봤다. 주목받는 디자이너가 누군지 그때그때 업데이트도 하고. 주말에 외박 받으면 쇼룸을 돌거나 기본적인 패턴 등을 배우러 다니느라 바빴지. 한 가방 브랜드의 공모 이벤트에 낸 디자인이 10여 개 당선작 중 하나로 뽑히기도 했다.

선수촌 입소했을 대는 내 앞으로 배송되는 택배 상자가 유독 많았다. 대부분은 신진 디자이너의 패션 아이템들이었는데 그때 선수촌에서 주문이 들어오는 게 신기해서인지 나를 기억해준 디자이너들과도 자연스럽게 친분이 쌓였다. 은퇴하고 나서 패션 업계에 뛰어들 때 많은 도움이 됐다. 사실 ‘멜로페’의 로고 디자인도 그렇게 알게 된 지인이 제작해줬다.“



-소위 ‘덕업일치(좋아하는 것을 파고드는 ’덕질‘과 직업이 일치)’의 삶을 살고 있다. 새로운 도전에 나선 것에 대해 부모님은 걱정하지 않으셨는지.

“그 반대다.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데 엄마의 영향이 컸다. 내가 3남매인데(언니 박승주 빙속, 남동생 박세영 쇼트트랙) 엄마는 우리 모두를 국가대표로 키워내셨다. 엄마는 우리들에게 ‘항상 스스로 가슴 뛰게 하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슬럼프를 겪다 훌쩍 외국으로 떠나겠다던 딸에게도 걱정보다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때 왜 그랬냐고 물어봤더니 엄마는 ‘뭐가 됐든 하나는 깨우치고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하시더라.”

-마지막으로 각오 한마디 해달라.

“하고 싶은 것에 망설이지 않고 도전했던 선수로 동료들과 팬들에게 기억되고 싶다. 얼마 전 엄마보다 연배가 있어 보이는 여성분이 우리 가방을 멘 사진을 보내주시면서 행복해하신 게 잊히지 않는다.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행복하게 하고 있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전해드릴 수 있는 그런 브랜드로 가꿔 나가고 싶다.”

/양준호 기자 miguel@
박해욱 기자
spook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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