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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후 품바 된 모범공무원···“우울증 낫게 한 음악 덕에 찐 인생 찾아”

■ 품바 공연 ‘노라조공연단’ 단장 안광현씨

암투병 아내 간호 위해 공직 명퇴…사별 후 우울증, 음악으로 극복

50대에 막내로 입단, 5년 전 공연단 창단…일본·미국서도 찾아와

“‘나’로 살 수 있어 품바는 천직…소중한 꿈, 시련 때문에 포기 않길”

군포시의 한 야외공연장에서 품바 공연을 하고 있는 안광현(가운데)씨. 안씨 제공


흥겨운 트로트 소리가 흘러나오는 경기 군포시의 한 야외공연장. 이 곳은 안광현(68)씨가 품바 공연을 하는 공간이다. 그의 공연 영상을 찍으려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품바 팬들이 무대를 에워쌌다. 북장단과 하나가 되는 그의 모습을 보며 관객들은 탄성을 내질렀다. 수십 년을 무대에 선 사람처럼 능숙한 춤사위. 하지만 그가 품바를 시작한 건 50세가 넘어서라고. “품바를 만나고 나서야 인생이 시작한 것 같아요.” 해맑게 웃으며 대답하는 그의 얼굴에는 음악을 동경해온 20대 청년 안씨의 모습이 얼핏 겹쳐 보였다.

안광현씨가 라이프점프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연주 기자

먼 길 돌아 찾게 된 품바의 꿈


안씨는 음악이 무엇인지 알게 된 그 순간부터 음악을 사랑했다고 한다. 대학에 진학해서도 끊임없이 음악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세상은 그 문을 쉽게 열어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 공직의 길로 들어섰다.

공무원 생활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기분이었다는 안씨. 활발히 활동하며 노동조합 간부를 맡기도 하고, 옥조근정훈장을 받을 만큼 성실하게 일했던 그였기에 남들이 보기에는 순탄한 삶을 사는 것 같았겠지만 그가 꿈꾸던 인생은 아니었다. 울컥울컥 비집어 올라오는 예술혼을 꾹꾹 눌러갔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위해서라면 감내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20여 년을 버텼다.

노동조합 간부로 활동하던 안광현씨. 왼쪽에 서있는 남성이 안씨다. 안씨 제공

안광현씨가 받은 훈장과 증서. 안씨 제공


순탄하기만 했던 그의 공직 생활에도 난관은 찾아왔다. 아내가 암 판정을 받은 것. 결국 아내의 병간호를 위해 공직 생활을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명예퇴직을 선택했다. 퇴직하기에는 다소 이른 51세 때의 일이다. 그의 정성이 무색하게도 아내는 혹독한 투병 생활 끝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세상의 전부를 잃어버린 그에게는 결국 우울증이 찾아왔다.

깊은 우울증으로 칩거 생활이 길어졌다. 퇴직한 지 3년 쯤 지났을까. 그에게 우연 같은 운명이 찾아왔다. 동네에 품바 공연이 온 것이다. 구경 차 보러 간 품바 공연에서 그는 저것이라면 우울증을 치료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본능적인 직감이 들었다. 각설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그였지만 공연이 끝나자마자 각설이에게 다가가 공연 단원으로 받아 달라고 간곡히 간청했다. 말단 단원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밀었지만 안씨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날부터 무대가 있는 곳은 어디든 그의 목적지가 됐다.

“50대 막내 단원이지만 천국이 따로 없었어요”


공무원에서 공연단 막내로 바뀐 삶은 어땠을까. 처음부터 공연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밑바닥부터 다시 올라와야 했다. 50대 중반의 나이에 그는 무대 밑 엿장수부터 시작했다. 온갖 잔심부름은 모두 그의 몫이었다. 노장 막내로서 서러움은 당연히 느꼈을 터.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는 “자존심은 전혀 상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우울증을 고쳐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어요. 꿈꾸던 음악을 할 수 있으니 제겐 천국이 따로 없었죠.” 평균 연령 40대의 젊은 단원들 사이에서 안씨는 뒤처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전국 각지로 공연을 다니면서도 틈이 날 때마다 보컬, 장구 학원을 다니며 부족한 실력을 채웠다. 스무살은 족히 어린 단장의 욕지거리를 들으면서도 그는 행복했다. 사랑하는 음악을 할 수 있어서,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어서.

뒤늦게 시작한 품바지만, 그가 겪은 삶의 경험은 무대의 깊이를 더해준다고 한다. 공무원 시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터득한 처세술 덕분이라고. 취객들이 공연의 흐름을 끊을 때, 괜히 관객이 심술을 부릴 때 능청맞게 상황을 모면하는 능력은 품바들 중 단연 그가 최고라고 한다. 품바에 입문한 지 7년이 지났을 무렵 그는 품바의 생리를 웬만큼 익혔다고 판단했다. 그는 바로 공연단에서 독립해 ‘놀아조공연단’을 창단했다. 공연을 하는데 대단한 것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관객이 있고 음악이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그의 무대였다. 트럭을 사서 음향 장비를 간단히 꾸몄고, 그렇게 다시 10년의 떠돌이 생활은 이어졌다.

품바 생활에 불만이 일절 없던 그였다. 하지만 오히려 주변에서 뒷말이 오갔다. 품바를 각설이라고 천대하는 시선 때문이었다. 관객으로 우연히 만나게 된 전 직장동료들은 다들 충격을 받고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질책했다고. 공직에 있을 때는 꽤나 엄격했던 그였기에 과거 동료들은 놀랄 만하다며 그는 웃었다. “직업의 귀천이 따로 있나요. 남도 본인도 겉치레로 판단하지 마세요. 사람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야 해요.”

안광현(왼쪽)씨와 놀아조공연단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안씨 제공


2019년 3월 그의 놀아조공연단은 경기 군포시의 한 야외공연장에 자리 잡았다. 가끔 외부 공연을 나가지만 이제 이곳이 놀아조공연단의 연고지다. 유튜브 영상을 보고 국내뿐 아니라 일본에서, 미국에서 놀아조 공연단을 찾는다. 그의 15년 품바 인생이 드디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공연단의 성공이 아니다. 공연을 하며 받은 행복을 관객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그의 궁극적 지향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그는 요양병원으로 공연 봉사를 나간다. “모두가 음악의 즐거움을 누릴 자격이 있고 나는 그 즐거움을 나눠줄 의무가 있어요.” 놀아조공연단은 이제 품바 팬들을 넘어 요양병원에서 앞다퉈 찾는 품바 공연단이 됐다.

“작은 시련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 말길”


공무원 시절과 품바가 된 지금을 비교해 달라는 질문에 그는 “공무원일 때는 ‘나’로 살 수 없었어요. 정해진 일들을 처리하는 기계 같은 삶을 살아야 했기에 의도하지 않아도 딱딱해지고 차가워졌죠. 품바야말로 제 천직 같아요. 제가 제 모습 그대로 존재할 수 있게 해줘요.” 각자의 사정 때문에 오래된 꿈을 포기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퇴직 후에는 안 단장처럼 마음속 고이 접어둔 꿈을 다시 펴보려는 중장년이 많다.

안광현씨가 손가락 하트를 들어보이고 있다. 안씨 제공


그런 중장년에게 안 단장은 굳은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퇴직 후에 품바를 배우겠다고 오는 사람 정말 많아요. 하지만 그중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1%도 안 됩니다. 실력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중간에 조금만 힘들어도 다들 금방 포기해요. 그 힘든 순간 어떻게든 버티면 뭐든 될 수 있는데 말이죠. 작은 시련들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 마세요. 오랜 시절 간직해온 꿈이라면 그만큼 소중히 대해주세요.”

퇴직은 아무리 준비해도 모자랄 것이 없는 인생의 중요 변곡점이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미리 대비하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 “무엇을 하든 항상 5년 후를 염두에 두고 사세요. 퇴직 후일수록 더 철저히 준비해야 하는 법입니다. 결국 생각하는 대로 인생은 흘러가기 마련이거든요.”

안 단장은 새로운 5년을 계획하고 있다. 5년 뒤에는 공연단을 후배에게 넘길 계획이라고. 은퇴는 아니다. 그는 본래의 꿈이었던 기타리스트의 삶을 살아보려고 한다. 다시 전국을 떠도는 음악 유랑객이 돼서 말이다.

이연주 기자
juya@rni.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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