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오후 경기 용인시 삼가동의 용인시처인노인복지관. 이 건물 2층에는 방송 진행을 위해 조성한 방음 부스가 있다. 마이크 앞에 앉은 이는 젊은 아나운서가 아닌 어르신. 부스 밖 ‘온에어(On Air)’라 쓰인 전광판에 불이 들어오자 어르신이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아나운서 박정운입니다.”
카메라를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원고를 읽어가는 그의 모습에 부스 밖 스태프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 방송은 용인시처인노인복지관이 만드는 ‘용인시니어(YIS) TV’의 뉴스 프로그램. 용인시에 거주하는 시니어 계층에 필요한 소식들을 안내하는 방송으로 매주 월요일마다 용인시처인노인복지관 유튜브 채널에 공개된다. 방송의 주 시청자가 시니어인 만큼, 소식을 전하는 아나운서 역시 시니어인 셈. 라이프점프는 YIS TV 뉴스에서 아나운서로 활약하는 박정운(80) 씨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용인시처인노인복지관은 인근 3000여 명의 어르신이 찾는 시설이다. 일반적인 돌봄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또래들과 교류하거나 각종 취미생활을 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2020년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는 복지관의 각종 대면 사업도 중단시켰다. 하지만 답답해하는 어르신들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이에 복지관은 사회적 거리 두기로 갑갑함을 느끼거나 소외될 수 있는 어르신을 대상으로 뉴스를 전달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복지관 2층에 10㎡ 남짓한 방음 부스를 만들고 영상을 찍을 카메라와 원고를 보여주는 프롬프터 등을 준비했다. 하지만 넉넉지 않은 살림에 외부 인력을 쓸 수는 없었다. 복지관 직원들은 직접 영상 편집 기술을 배워 PD가 됐고, 카메라 앞에 서는 아나운서가 됐다. 서툴지만 정성을 담아 제작한 영상을 코로나19 이전 복지관을 찾아왔던 어르신들에게 보내드리면서 YIS TV가 시작됐다.
2021년 복지관의 문이 다시 열렸다. 어르신들이 다시 오실 수 있게 되자 YIS TV는 정체성의 전환을 감행했다. 단순히 정보를 제공하던 것을 어르신들이 주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일자리로 도약하기로 한 것이다. 4년이 지난 현재, YIS TV는 아나운서 5명과 촬영 겸 대본 작가 1명, 영상 편집자 1명 등 총 7명의 직원을 갖춘 소규모 방송 제작사로 거듭났다. 물론 이곳에서 일하는 직원은 모두 시니어다. 영상을 기획하고 촬영하는 일, 프로그램 ‘프리미어’로 영상을 편집하고 자막을 다는 일, 출연하는 아나운서까지 모두 60세 이상의 시니어들이 맡고 있다.
박정운 씨 역시 2021년부터 YIS TV의 아나운서로 활약하고 있다. 본래 전업주부였던 박 씨는 50대 후반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다. 병원을 여러 번 찾아가도 나아질 기미가 없자, 그의 딸은 그에게 웃음 치료를 권했다. 억지로라도 소리 내어 웃고, 억눌렸던 감정을 배출하는 일을 하면서 그를 짓눌렀던 우울감이 점점 사라졌다. 효과를 본 박 씨는 다른 이들에게도 웃음 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침 용인시가 정책으로 발전시킬 만한 시민들의 제안을 받는다는 얘기를 듣고 시에 ‘웃음을 나눌 공간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그 결과 용인시는 평생학습 프로그램의 하나로 웃음 교실을 개설했고, 2011년에는 복지관에도 해당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1주일에 닷새씩 복지관을 찾아 웃음 치료 교실을 열고, 웃음을 전파하는 박 씨의 모습은 YIS TV를 맡고 있는 도현진 팀장의 눈에 띄었다. YIS TV 개국을 앞두고 함께 활동할 어르신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던 도 팀장은 활달한 박 씨에게 아나운서로 일해보자고 제안했다.
“어느 날인가 도 팀장 전화를 받았는데 ‘아나운서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하더라고요. ‘나는 목소리도 투박하고 예쁘지 않다’고 했더니 ‘개성 있는 목소리면 된다’고 하기에 바로 수락했지요.”
그렇게 박 씨는 2021년부터 YIS TV의 아나운서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복지관까지의 출근길이 쉽지는 않다. 몇 해 전 사고로 다리를 다친 탓에 걸음이 남들보다 느리다 보니 집에서 복지관까지는 왕복 4시간이나 걸린다. 그럼에도 박 씨가 집 앞의 다른 복지관 대신 용인시처인노인복지관을 찾는 이유는 이곳에서 그가 맡은 역할이 있기 때문이란다. 아나운서 활동을 통해 삶의 변화를 느낀 만큼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해내야겠다는 책임감도 큰 것.
아나운서 활동은 박 씨의 일상도 바꿔놓았다. “예전에는 복지관에서 아는 사람을 보면 큰소리로 떠들고 방방 뛰곤 했죠. 하지만 아나운서가 된 뒤로는 달라졌어요. 공손하게 인사하고, 옷도 아무거나 입지 않아요. 집에서도 ‘빨래하고 밥하는 엄마’가 아니라 ‘아나운서 박정운’으로 대접받으니 얼마나 재미있는지 몰라요. 여기 오면 보람 있고 행복해요.”
아나운서 활동을 더 잘 하기 위한 노력도 잊지 않는다. 방송을 모니터링하면서 스스로 바른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발음은 물론이고 표정 하나하나 허투루 넘어가지 않는다.
“내 뉴스 영상을 보면서 내가 말이 좀 빠르고 어깨가 굽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웃는 표정인 줄 알았는데 찡그릴 때도 있고요. 이제는 집에서 걸을 때도 자세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고 운동도 꾸준하게 해요. 스트레칭도 열심히 하고요. 지금은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시니어 모델 2기로도 활동한답니다.”
삶에 활력을 얻은 것은 박 씨 뿐만 아니다. YIS TV에서 활동하는 어르신들은 모두 활력을 되찾고 언어 표현 능력도 향상됐다는 게 도 팀장의 생각이다. “아나운서분들이 어느샌가 조리 있게 말씀하시고, 말투도 온화하게 바뀌시더라고요. 지인들에게 프로그램을 홍보하는 일도 적극적이고요. 시니어들은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지만 다양한 활동을 하면 생기가 생겨요. 백세시대인 만큼 겁내지 말고 도전하시길 바랍니다.”
아나운서 활동을 통해 세상 앞에 더 당당하게 설 수 있게 됐다는 박 씨. 그는 “‘할 수 있다’는 마음만 가지면 뭐든 할 수 있다”며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무언갈 하려고 마음 먹으면 도와주는 사람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 씨는 오늘도 방송을 마무리하며 환한 미소로 외친다. “청취자 여러분, 좋아요와 구독 꼭 눌러주세요.”
- 정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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