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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나이 69세 청춘합창단의 꿈···“한국전쟁 기억 마지막 세대, 참전국 돌며 감사 전하고파”

■ 시니어 합창단 ‘청춘합창단’

2011년 '남자의 자격'서 결성, 현재까지 이어져

UN 본부, 카네기홀 등 세계무대 오르며 실력 입증

“평양 대극장에서 통일 염원 담은 노래 부를 것”


한때 중년 남성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예능 프로그램이 있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KBS 2TV의 예능 ‘해피선데이’의 한 코너로 방영된 ‘남자의 자격’이다. 중년 남성이 살아가며 한 번쯤은 꿈꿔봤을 도전에 나서는 내용이었다. 그중에서도 2011년 진행된 ‘청춘합창단’ 편은 인생의 굴곡을 지나온 중년들이 노래로 감동을 전하며 최고 시청률 29.7%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때 그 합창단은 지금 어떻게 됐을까. 방송이 끝난 지 14년이 훌쩍 지났지만 한때의 인기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실력파 시니어 합창단으로 성장해 세계 무대에 서고, 기립박수를 받는 등 여전히 노래로 감동을 전한다고 한다.

방송 프로그램 속의 한 에피소드로 잊힐 뻔했던 아마추어 시니어 합창단이 어떻게 세계 무대에 오르고, 세계가 감동할 만한 실력을 갖추게 됐을까. 이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져 매주 연습이 열린다는 경기 과천시의 과천시민회관을 찾아 윤학수(70) 청춘합창단장과 단원들을 만났다.

정기 연습에 참여한 윤학수(가운데) 청춘합창단장. 정예지 기자


청춘합창단은 매주 화요일 오후 2시, 이 회관의 한 연습실을 빌려 정기 연습을 한다. 연습실에 들어서자 머리가 희끗희끗한 시니어 50명이 이미 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단원들의 연령대는 50대 초반부터 80대 후반까지 다양했다. 연습이 시작되자 소프라노와 알토, 테너, 베이스로 나뉘어 일사불란하게 단원들이 자리에 앉았고, 김상경 청춘합창단 지휘자의 손짓에 맞춰 곧바로 화음을 쌓았다.

청춘합창단의 김상경 지휘자. 정예지 기자


“테너부터 들어갑니다. 일어나세요. 두 번째 분, 혼자 다시 불러봅시다.”

어느새 14년 차인지라 느긋하게 호흡을 맞춰보는 시간쯤으로 생각했지만 모습은 사뭇 진지했다. 웃음기 없이 지휘자의 지시를 따라 음정과 발성, 하모니를 반복 점검하며 3시간 가까이 연습을 이어갔다. 쉬엄쉬엄 하는 아마추어 모임이 아닌 완벽한 하모니를 목표로 하는 ‘진짜’ 합창단의 모습이었다.

윤 단장은 “이렇게 연습이 빡빡한데도 출석률이 95%에 달한다”며 “오늘도 사정이 있는 한 분 빼고 전원이 참석했고, 창립 멤버 20명 중 6명이 아직도 함께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경기 과천시 과천시민회관에서 열린 청춘합창단 수업 현장. 정예지 기자


청춘합창단에는 암묵적인 룰이 하나 있다. 큰 사정이 없는 한 매주 모이는 연습에 연 12회 이상 불참하면 퇴출된다는 룰이다. 단원들은 이탈리아어나 스와힐리어 등 낯선 언어로 된 곡도 암보(악보를 외워 기억함)해야 한다. 보통 한 차례 공연에 12곡을 부르고, 앵콜곡까지 포함하면 총 15곡을 무대에 올린다. 어느 한 무대에서는 6개의 언어로 15곡을 외워야 했던 적도 있다. 그러려면 암기력은 물론 무대를 버틸 체력도 필수다.

모든 단원은 매년 ‘재오디션’도 치른다. 나이가 들며 목소리도 바뀌기 마련. 1년 동안 얼마나 성장했고, 목소리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지휘자가 한명 한명의 음색이나 호흡을 세심하게 살피고 파트를 바꾸기도 한다. 이런 스파르타 훈련에도 시니어 단원들이 꾸준히 참여하는 이유는 ‘합창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기 때문이란다.

윤 단장은 “하모니를 함께 맞춰온 사이는 쉽게 헤어질 수가 없다”고 했다. 같은 곡을 수없이 함께 부르며 합을 맞추고, 무대 위의 감동으로 묶인 사이는 쉽게 끊어질 수 없다는 말이다.

TV 방영이 끝난 2011년 9월, 청춘합창단이 사라지지 않고 두 달 후 민간합창단으로 재결성된 이유도 바로 그 매력 때문일 게다.

지난달 경기 과천시 과천시민회관에서 열린 청춘합창단 수업 현장. 정예지 기자


시간을 거슬러 청춘합창단 재결성 때로 돌아가면 40명의 단원 중 연예인 20명은 떠나고 일반인 20명이 남았다. 그중 창립멤버로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최규용 단원이 “우리끼리라도 이 합창단을 이어가 보자”고 제안했고, 모두가 찬성했다.

연예인은 빠졌어도 국민 예능의 영향력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인기의 여파로 프로그램이 종료되고도 몇 해 동안은 각종 행사에 초청 받아 전국을 다니며 무대에 섰다. 창단 멤버이며 현재 최고령 단원으로 있는 배용자(89) 씨는 당시를 “그때는 마치 구름을 타고 다니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관객들은 TV에서 보던 단원들을 실제로 만나는 것만으로도 반기며 박수를 보냈다. 단원으로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영우(66) 서울시파크골프협회장은 “무대에 설 때면 관객들의 박수 덕분에 큰 기운을 받곤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청춘합창단에도 고민이 있었다. ‘언젠가는 실력이 드러난다. 지금의 인기나 화제성에 의존하지 않고,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위기감이었다. 애초에 방송 예능으로 시작된 합창단인지라 선발 당시에는 노래 실력보다는 인생 스토리 등이 더 주목 받았다. 그러나 시니어 합창단으로 제대로 자리 잡으려면 실력을 쌓고, 단원을 더 보충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시점에 윤 단장이 합류했다.

“고등학생 때 중창단을 했어요. 이후로도 계속 합창을 했고요. 방송을 볼 때마다 얼마나 가입하고 싶던지요.”

당시 윤 단장은 국방정보본부장을 역임하던 때라 합창단에 가입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은퇴를 한 달 앞 둔 시점에 고교 선배이자 당시 청춘합창단장이었던 권대욱 이사장(명예단장)로부터 합류 제안을 받고 2012년 일원이 됐다.

새로운 인물들이 합창단에 합류하면서 활동 영역은 점차 확대됐다. 단원들에게도 동기부여가 필요한 시점이 왔다. 2012년, 권대욱 전 단장은 당시 합창단 대외협력처장과 부단장을 맡고 있던 윤 단장에게 “미국의 UN 본부에서 공연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될 거라는 확신은커녕 가능성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연륜과 경험은 여러 문제를 풀어내는 힘이 됐다. 윤 단장은 국방무관을 지내며 미국에 3년 체류했던 경험과 네트워크 등을 활용해 UN과 연락을 시도했다. 2014년에는 김 지휘자도 합류하며 단원들의 실력을 끌어올렸다.

결국 2015년 6월 15일, UN과 세계노인학대방지망(INPEA)이 지정한 ‘세계 노인학대 인식의 날’에 UN 본부에서 공연을 하게 됐다. 2017년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국제 합창 페스티벌’에는 한국 합창단 최초로 초청을 받았다. 이들은 한국전쟁의 참상을 담은 에릭 레비의 노래 ‘I Believe’와 구노의 ‘Ave Maria’를 결합한 곡을 무대에 올렸다. 공연이 끝나자 1000명이 넘는 관객이 일제히 일어나 5분 넘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몇몇은 울었죠. 유럽은 노래 못 하면 계란이 날아오는 곳이에요. 그런 무대에서 기립박수를 받다니요. 상금이 아니라 진정성으로 노래한 덕분인 것 같습니다.”

지난달 경기 과천시 과천시민회관에서 열린 청춘합창단 수업 현장. 정예지 기자


최근 청춘합창단은 시니어 세대만이 할 수 있는 사회적 기여를 고민하고 있다.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마지막 세대로서 참전국을 순회하며 감사와 위로의 노래를 전하는 프로젝트가 그 일환이다. 이 목표를 위해 2023년부터는 대회 출전도 결심했다. 과거의 청춘합창단은 “국민이 만들어주고 키워준 합창단이 상금을 위해 경쟁에 나서는 건 맞지 않다”는 이유로 축제에만 나갈 뿐 대회 출전은 꺼렸다. 하지만 세계 순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세계적 수준의 합창단이라는 객관적 인증이 먼저 필요했다. 음정을 다시 잡고, 발성을 새로 배우고, 파트를 바꾸는 등 나이를 잊고 계속 도전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무대. 그래서인지 대회에 출전하자마자 합창단은 수상을 했다.

첫 성과는 2023년 연세대에서 열린 ‘제10회 골든에이지 전국합창대회’다. 이 대회에서 금상(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 대전 한밭대에서 열린 ‘제25회 대통령상 전국합창경연대회’에서 이들은 대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대회는 여성, 남성혼성, 실버(시니어) 등 세 부문으로 나뉘어 진행됐는데 대상은 부문 구분 없이 전체 참가팀 중 최고의 팀에게 주어졌다. 실버합창단이 대상을 받은 것은 이 대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난해 청춘합창단은 뉴질랜드에서 열린 합창계의 올림픽 ‘세계합창경연대회’에 도전장을 냈다. 전 세계의 125개 팀, 2500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대회였다. 청춘합창단은 시니어 혼성 부문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세계 최고의 시니어 합창단’이라는 목표에 한걸음 더 가까워졌다.

이들은 본격적인 순회 공연을 앞두고 있다. 오는 10월 튀르키예와 그리스를 시작으로 4년에 걸쳐 유럽과 아시아, 미국 등 22개 참전국가를 방문할 예정이다. 공연 이후에는 개별로 참전용사를 만나 합창을 선물할 계획이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에는 평양이 있다. 평양 대극장에서 통일의 염원을 담아 노래를 부르는 날을 꿈꾸고 있다.

“국민이 만들어준 합창단에서 이제는 국격을 높이는 합창단이 되겠습니다.”

정예지 기자
yeji@rni.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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